세 번째로 메타버스 공간에서 교회는 오프라인보다 더 심각한 가나안 성도와 위선적인 신자를 배출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목회자들의 고민거리는 교인들의 자유로운 교회 이탈이다. 작금의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조그마한 갈등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과 인내로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다른 교회로 옮긴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교인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특정 교회를 정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가나안 신자(교회를 안 나가는 신자)가 된다. 그나마 오프라인 상태에서는 신자가 가나안 성도가 되기까지 많은 고민과 갈등과 시간이 경과한다. 그러나 메타버스에서 교회를 옮기는 것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 아무 죄책감 없이 한 번의 클릭으로 얼마든지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교인들은 쇼핑하듯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넘나들며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줄 스승을 찾아다니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놀랍게도 이 사실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비대면 예배를 하는 가운데 입증됐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학살에 가까운 1만여 교회와 130만 성도들을 세상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메타버스 시대가 본격화되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다. 메타버스 시대의 교인들은 자신의 아바타로 예배를 하면서 오프라인으로 예배를 할 때보다 훨씬 위선적으로 될 것이다. 가나안 교인의 문제는 대형 교회를 다니며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예배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목회자의 목회 지도를 원치 않는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감추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려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메타버스 교회 안에서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쉬워진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편안한 옷차림과 불경건한 자세로 아무 경외심 없이 VR을 착용한 체 아바타로 예배할 것이다. 이들의 아바타는 그들의 불경건과 위선을 철저히 위장해 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과연 참된 회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네 번째로 메타버스 교회는 교회의 부익부 빈익빈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대형교회는 엄청난 재력으로 많은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고용해, 더 화려하고 편리한 플랫폼과 홍보로 많은 교인들을 흡수할 것이다. 이에 반해 재정적으로 열악한 교회들은 어설픈 플랫폼과 홍보력으로 자생력을 잃고 급격히 소멸할 것이다. 향후 메타버스는 개척이라는 것이 더욱 어려운 환경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다섯 번째로 메타버스 교회는 성도의 교통함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상당수 교회는 비대면 예배를 했다. 비대면 예배로 인해 가장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성도의 교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다는 점이다. 성경은 성도가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이 참 신자 됨의 표징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실을 요한일서 2:9-11은 아주 명확하게 가르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참된 성도들에게 요구한다. 참된 성도라면 교통 없는 신앙을 견딜 수 없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우울해지며, 세상에 대한 저항력이 점차 사라진다. 성도는 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러나 메타버스 교회가 본격화되면 가족들끼리 하나의 모니터로 하는 예배조차 사라지게 된다. 비록 한 가정에서 예배하더라도 각자의 VR로 눈을 가리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다양한 센서로 오감을 외부와 차단하여 메타버스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한 공간에 있는 가족조차 단절된 상태가 된다. 이는 온 가족이나 친구들이 한 공간에 있어도 대화 없이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문화에서 쉽게 짐작 가능하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의 눈동자를 본다. 음성도 스피커를 통해 전송된 소리를 듣는다. 스킨십도 디지털로 가공된 것이다. 과연 이런 만남 속에서 참된 성도의 교통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소리를 들으며, 스킨십을 할 때 가능하다. 그러면 성경적 대안은 무엇인가? 다음 칼럼에서 이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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