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장로교회는 초창기 미국의 장로교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장로 직분과 관련하여 받은 영향은 지금도 한국 장로교회 여러 교단이 가진 헌법의 교회정치 여러 조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1880년 중반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처음 파송한 당시 미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장로교회가 아니라 북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로 나뉘어 있었다. 특별히 북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 양 교회는 1840-1861년 사이에 약 20년 동안 장로 직분을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가 미국 북 장로교회의 대표자라면 제임스 쏜웰(James. H. Thornwell, 1812-1862)은 미국 남 장로교회의 대표자였다. 두 사람 모두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였지만 교회정치 만큼은 서로 의견이 달랐다. 예를 들면 장로를 교인의 대표로 보는 것은 미국 북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견해이고, 반면 미국 남 장로교회는 장로가 노회의 회원이기에 목사 임직식에서 안수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와 함께 초창기 한국에 온 내한 선교사들에는 미국 북 장로교회는 물론 미국 남 장로교회 출신 선교사들도 함께 있었다. 바로 이들이 우리 장로교회의 헌법 중에서 교회정치를 함께 작성하였다. 양 교회가 벌인 장로직 논쟁의 열기가 아직 채 식기 전인 1880년 중반부터 양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우고 가르치고 교회정치를 작성하고 노회를 세웠다. 그러니 한국장로교회의 헌법 교회정치에서 두 교회가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 21세기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교회가 약 150년 전에 일어난 해묵은 미국 장로교회의 장로직 논쟁을 뜬금없이 살피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도 그 논쟁이 끼친 영향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 중에서 예장통합 총회의 오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는 장로 노회장의 목사 안수 문제이다. 통합 교회는 매년 10명 안팎의 장로 노회장이 나오는데, 일부 장로 노회장들은 노회장으로서 노회에 위임한 공적 목사 안수에 참여하는 것이 문제없다고 주장하고 이에 반해 목사 후보생들은 장로에게 안수를 받을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장로 노회장의 목사 안수 문제를 10년 이상 끌어오고 있다. 장로를 노회장으로 세우면서도 정작 노회에 위임한 목사 안수식에서는 장로 노회장이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은 미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북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가 장로직을 두고 펼친 논쟁을 이해하지 않고는 납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교회에 과제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우리 헌법 교회정치에서 적어도 장로 직분과 관련해서 양 교회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식별하는 것은 물론, 그리고 이를 가지고 다시 성경과 우리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서 바른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일차적으로 19세기 중반 약 20년 동안 미국 장로교회에 있었던 장로직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글은 이 논쟁을 간략하게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사적 배경
미국 장로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두고 북 장로교회와 남 장로교회, 찰스 하지와 제임스 쏜웰 사이의 논쟁은 초창기 미국 장로교회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에 영국의 회중주의자들(회중정치를 신봉하는 자들)과 스코틀랜드 장로회주의자(장로회정치를 신봉하는 자들)들이 각각 신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는데, 회중주의자들은 뉴잉글랜드에 장로회주의자들은 뉴저지 등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인구가 늘면서 두 그룹은 북부 오하이오와 서부 뉴욕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지역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두 그룹은 교리적으로는 모두 칼빈주의이지만 교회정치에서는 서로 달랐다. 그러나 이때는 어느 정도 자기들의 입장을 서로 수정할 수 있었다.
한편 서부 진출을 위해 장로교회가 회중교회와 협력하면서 생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뉴헤이븐 등이 중심이 된 신(新)학파의 사색 신학이 장로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당장 장로교회 안에서 두 가지 학파와 흐름이 서로 충돌을 일으켰다. 구(舊)학파는 신앙고백과 장로회 정치 원리에 충실하기를 원했지만 신(新)학파는 이 둘에 무관심하였다.
결국 1834-36년 총회에서 신학파가 우위를 점하여 교리적 오류를 관용하게 되고 장로교회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는다. 이때 프린스턴 신학교의 초기 교수 일부(Archibald Alexander, Samuel Miller)가 구학파에 적극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1837년 총회에서는 구학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이로써 1801년에 결정하여 37년 동안 유지해 온 회중교회와의 통합안을 폐기하고 이로써 구학파는 장로교회의 정체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통합안이 폐기되었다고 해서 장로교회 안에 일어난 논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논쟁 한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장로 직분에 관한 것이었다. 1843년 총회가 결정한 두 가지는 장로 직분의 원리에 대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첫째는 안수의 문제이고 둘째는 노회 개회 성수 건이었다. 즉 총회는 목사 임직 시 장로가 안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목사 3인으로도 노회가 개회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 당장 로버트 브레킨리지(Breckinridge)와 제임스 쏜웰은 이의를 제기하고 교회에서 장로의 합법적인 권리를 옹호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면서 찰스 하지와 제임스 쏜웰이 각각 온건한 장로회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장로회주의자들의 대변인으로서 인식되고, 위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도 구별되는 그룹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즉 하지의 견해를 따르는 교회는 주로 북부 지역에 있는 것에 비해 쏜웰을 따르는 교회는 주로 남부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 논쟁은 거의 20년 이상 이어졌다(1840-1861년). 1861년 4월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 장로교회는 분열하고 말았다(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PCUS/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CUSA).
발체: 개혁정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