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사 [창 18:16-33]를 읽고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설교하였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망하시겠다고 할 때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십니까?” 하고 아브라함이 간절히 구하는 내용이다. 그가 “의인50인이 있다면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의인 50인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26절]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의인 45인만 있어도..,40인만 있어도…,30인만., 20인만 …식으로 내려가다, 나중에는 “10인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멸하지 아니하리라.”[32절]고 하시는 내용으로, 그 다음 장인 19장의 소돔 고모라 성이 멸망 받는 기사로 이어진다.
이 내용으로 여러 가지로 설교할 수 있겠는데, 그 설교자는 ‘의인 한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가 복을 받고 번영한다.’는 요지로 설교하였다. 아주 적절한 예화로 가정, 고아원, 국가가 의인 한 사람 때문에 살아남고, 복을 받은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범하지 말고 의롭게 살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 예수님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문제점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이 없어 소돔의 죄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본문으로 삼은 설교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설교는 유대인 회당에서도 무난하게 들릴 수 있다는데 그 문제점이 크다고 하겠다.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없고, 유대인 회당에서도 통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하나의 연설[speech]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을 본문으로 삼는 설교도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돔성에서 의인을 찾으시던 그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로 의인이 되었음을 일깨워주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이미 의인이 된 기쁜 소식이 강조되었어야 한다. 부족하고 완악한 내 자신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음[요5:24]도 강조 되었으면 좋은 설교가 될 뻔하였다. 그래서 우리성도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없다는 것도 들려주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설교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미 의인으로 구원 받은 우리는 흥감해서 바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더라면…
왜냐하면 그 설교자가 말하는 ‘의’는 따지고 보면 예수님 없는 ‘의’요, 자신의 ‘의’였다. 이 땅 위에서 ‘자기 의’로써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1]고 하지 않았는가? 나도 이런 설교를 해오지 않았는지…? 오늘날 교회 안에 설교자보다 연설자가 많음을 한탄한다. 대개 설교는 앞 뒤 분간을 못하는 교인들을 섬기는 경우가 많은 일이라 생각하니…하나님 앞에서 안타깝고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황창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