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화는 가이샤랴 빌립보 사건 이후에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 때는 우리 주님의 지상 사역의 거의 마지막 시기였다 거의 삼 년 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누가복음 5장에서 그 부르심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다. 그들이 메시야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에게는 견뎌내야 할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값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랑하는 부친을 떠나며, 조용한 마을에서의 좋은 고기잡이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마태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가 주재하고 있던 수입이 좋은 세무서를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주님을 따르던 그 2년 이상의 기간은 가난과 혼란과 수치의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훈련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에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의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일 년을 동행했던 사십 연을 동행했던 당신은 여전히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당신은 그 분문이 “매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참된 신자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어디에나 있으며 또한 일생에 걸쳐서 있으며, 매일 져야 하는 짐이다.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 있는데 그곳은 바로 묘지이다. 우리는 자기 부인의 고통을 천상으로까지 가지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생에서 십자가의 고통이 끝나리라는 어떤 희망도 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아무든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나는 오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미 설명했듯이 십자가를 고통스러운 것이다. 만약 무서운 고통의 요소가 제거 된다면 “십자가”라는 말은 모든 의미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주어졌던 가장 잔인한 고통을 견디셨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는 외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적인 고통까지도 대표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완전하신 우리 주님에게는 외적인 고통보다도 십자가의 내적인 고통이 훨씬 컸던 것이다.
히브리서 12:2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의 몸에 박힌 못이나 흘리신 피의 고통보다도, 수치는 그의 거룩한 존엄에 대한 더욱 큰 고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가 그에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 성부 앞에서 자신이 죄가 된다는 사실의 당황과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대적들 앞에서 공공연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의 당혹감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과 천사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불법과 공개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수치가 민감한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구절에서의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의 초점은 내적인 고통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십자가는 단순한 신체적 고통만이 아니다. 스데반은 “매일” 돌에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시지 않는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사도들은 “매일” 감옥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뿐 아니라 가장 좋은 때에도 져야 할 십자가는 있는 법이다. 베드로는 투쟁의 시기뿐 아니라 국가적 평화가 지속되던 기간에도 십자가를 지고 갔다. 내적인 고통이야말로 십자가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십자가를 지라는 우리 주님의 요구를 오해하게 한다.
참된 성도가 우리 주님의 이 요구를 읽을 때에 불필요한 경고의 낙담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오해 때문이다. 당신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천부께서만 아시는 십자가를 지고 있을 수도 있다. 얼마나 자주 목사는 회중의 몇몇 지체들이 목사 자신은 생각지도 못했던 고난을 통한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알고 놀라는가. 십자가의 가장 깊은 고통은 공개적으로 들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모든 구절을 보면,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지라”고 명령하신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그의 뜻을 거스리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우시지는 않는다. 그는 십자가를 사람의 등에 붙들어 매어 놓는 일은 없다. 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큰 고통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어쩔 수 없은 고통들은 징계의 손이거나 혹은 연단시키는 자비의 손일 수가 있다. 이런 것들은 환란이지 십자가는 아니다.십자가는 자아가 고통스럽게 부인되는 사람에 의해서만 지어져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