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 1. 그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구주의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합당한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유 1. 죄인이 실제로 의롭다함을 얻기 전까지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무한한 죄책(罪責), 곧 죄의 무한한 사악함이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생기는 무한한 죄책을 생각할 때, 그런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죄의 무한한 사악함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무한한 존재를 대상으로 범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사악함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은 그 대상이 되는 존재 안에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손실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느냐에 비례하여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히 존엄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이와같은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까닭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우리의 비천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불순종은 한없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이룬 순종의 가치로서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말끔히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가치한 것만큼 위대하고 가치있는 분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아직 받지 못한 죄인의 인격을 어느 정도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의롭다함을 아직 얻지 못한 죄인을 어느 정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불쾌함과 진노를 덜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이런 일이 하나님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실제로 소유하지 못하고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죄책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한한 죄책은 죄 사함을 받지 않는 한 결단코 제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죄책이나 무한한 비열함에 비할 때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죄책에서 유한한 선함을 빼서 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람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 이전에도 영적으로 선한 것이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의롭다함을 얻은 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경건함이나 탁월함으로써 인정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칭의에 있어서 사람(자연인)은 전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로 고려됩니다.
이유 2. 구주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일보다 먼저 앞서는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속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인을 자유케 하시는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정죄된 상태 가운데 계속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율법의 공의로움으로 어떤 사람을 정죄하신 후에 아직 그 정죄가 제거되지 않았는데도 그 죄인에게 있는 어떤 것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걸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맨 처음부터 속해 있던 옛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를 긍휼히 여기사 엄격하고 호된 옛 율법을 폐지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법 아래 두셨다. 좀 더 관대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 자체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을 만족시키고 성취하신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매우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대적하는 힘을 계속 발휘합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 자체가 폐지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이전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위한 사전단계이든지 그 사람을 효과적으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증 2.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은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조건적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조건적으로만 죄 사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나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영원한 비참함에서 죄인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죄 사함을 얻고 그와같은 비참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최종적인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앞으로도 남아있는 몇몇 조건들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에 실질적인 자유가 유보되어 있다면, 그것은 조건적으로만 죄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런 경우는 철저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가 지속적으로 순종한다면 결국 죄 사함을 받을 것이고 지옥으로부터도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건부 죄 사함은 결코 죄 사함이나 칭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모든 인류에게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진실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생각은 중보자의 영광을 훼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속하는 것을 사람의 미덕으로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을 대신 올려놓고, 사람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