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믿음의근거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
그와 같은 경우를 누가복음 22장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은 아시면서도 그냥 놔두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가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베드로의 통곡이 우리의 통곡입니다. 이 실패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그 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룰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마치 “다 버릴지라도”의 댓구와 같습니다. “주여,그러하외다.”
이런 사실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어릴 때부터 싹이 파란 영재들을 쓰실 것 같은데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김치를 담글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이죠? 배추를 절구는 것입니다. 푹, 절구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그렇게 하십니다. 통곡하고 돌아와야만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이 고백이 진실이지만 이것을 이룰 힘은 나에게 없습니다” 하는 무언의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10.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처음에 베드로의 고백은 그것이 곧 믿음이요,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 번 부인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게 만든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자기의 의(義)”를 빼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과정인 것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는 것으론 안 된다는 것입니다.통곡하고 돌아오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싸움인 것입니다. “내가!”가 아니라 “주님이”일 때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빼버리고 주만 붙들도록 만드심으로 믿음의 성장, 성숙, 승리의 발전을 이루십니다.반면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승리,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통곡의 과정을 실패로, 절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지만 결코 내 주머니에는 절대 허락을 안 하십니다. 주 안에 들어오라는 것이지 내 주머니에 채워주셔서 큰소리치게 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