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神) 지식과 경외함
역사적으로 한 신학자의 위대함은 단지 학문 자체만이 아니라,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함’(doing the theology)의 독특함에서 입증된다. 칼빈이 파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개혁 신앙을 갖게 된 후에 그가 언제나 자신의 삶의 모토(motto)로 삼았던 것이 있다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이 바로 그것이었다. 경건이 먼저였다. 그 다음 학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에 유익을 주지않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을 안 지식에 관하여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지식에 의하여 우리가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관심이 무엇이어야하며,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즉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에 관하여 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앙이나 경건이 없는곳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인격적인 앎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경건 없이는, 신학적인 탐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신학함이 우리의 신학 수업 중에 고쳐지지 않으면,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수학을 통하여 천국을 알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이 어리석은 공부가 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면 마땅히 그 지식은 우리에게 경외감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효력을 가져야합니다. 그 지식외 두 번째 효력은 우리를 안내하고 가르쳐서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 구하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구한 것을 받았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는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방식으로 틀이 짜여져 있지 않다면, 정말 우리의 삶은 서글프게도 부패한다는 피할 수 없는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모든 선함의 기원과 근원임을 부인하는 그릇된 개념은 분명하지 못한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이 지성의 부패로 인하여 탐구의 바른과정을 벗어나게 되지만 않았었다면,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애착심이 함께 일어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경건한 지성은 그 자체로 어떤 류의 신도 찾지 않고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류의 특성을 상상하여 하나님이 그런 특성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이 꾸며대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특성을 계시하여 주셨는데, 경건한 지성은 바로 그 계시하신 특성으로 만족해하며 언제나 부지런하여 깨어 하나님의 뜻을 범하지는 않았는지, 주제 넘은 무엄한 자세로 바른 길을 벗어나 방황하지는 않고 있는지 돌아보아 자신을 살핍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존중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더욱 더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엄중하게 범죄를 심판하실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여기므로, 항상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의 심판받을 자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재판 보좌에 대한 외경심 속에 항상 깨어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까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알고 두려워한 나머지 그 재판 보좌 앞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스스로 그 보화에서 물러서기를 바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심판 보좌를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악을 복수하시는 분인 동시에 의인에게 상을주시는 분 이심을 믿고 환영합니다. … 순전하고 진정한 신앙, 곧 하나님을 확신하는 것이 그와 같이 진지한 두려움(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율법이 지시하는 합법적인 경배를 내포하고 있는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멋대로 고백을 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더욱 주의깊게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 분을 경외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선(善)의 근원이시며, 이에 관한 아무 것이라도 그 분 밖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창조하신 우주를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신앙을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이 결합된 것을 가리키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잘못된 신학함의 위험과 진정한 의미의 신학함에 대하여 알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고, 그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낳는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하면 더할수록 주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도 자라가고, 그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며, 이 모든 탐구는 신앙과 경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함이 얼마나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신학에 있어서 이러한 경고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신학자였고 영향력있는 목회자이자 설교자였던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에 의해서도 반복된다.
“역사 비평적 연구 방법이 횡행하는 이러한 신학의 시대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성경 말씀과 연결된 강건한 영적인 생명력이 신학 연구에 탄탄한 기반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젊은 신학생들의 희미하고 미성숙한 사고력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이 가져다 주는 생명력에서 그 신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피를 공급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