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아트 엘로힘’
성경에는 자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론된다. 구약 성경에서는 ‘다아트 앨로힘’이라는 표현을 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식'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모든 종교와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이해한다(호 4:6). 그리고 그 지식이 계속 그 사람 안에 거하는 것도 신앙과 사랑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올 보여준다.
칼빈의 [基督敎 綱要] 시작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신지식(神知훌)에 대한 사상도 이러한 성경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이미 신학이라는 학문적 활동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고, 신학의 본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을 더 잘섬기기를 원하는 거룩한 사랑과 두려움의 정서를 가진 사람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의 기원이 신령한 은혜 체험에 있음을 누누히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인간 마음의 정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신앙에 있어서) 정서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지닌 성향과 의지의 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실천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에 두 가지 기능을 부여하셨다 그 하나는 지각하고 사변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것을 통해서 영혼은 여러 가지 사물을 분별하여 살피고 판단한다. 우리는그것을 ‘이해’(understanding)라고 부른다. 또 하나의 기능은 단순히 사물을 지각하고 살피는 것만이 아니라 살피고 생각하는 것들에 관하여 어떤 성향을 보이게 하는 기능이다. 그 살펴보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마음이 기울어지게 하든지, 아니면 그것들로 부터 멀어지며 반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지식에 불붙게 할 목적으로 습득되는 신학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더욱 정성껏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배우는 하나님에 관한지식이 아닌 한,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실천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적인 변화에 대한 체험 없이 단지 자랑을 위하여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적인 간음이다. 식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 없이는 칼빈을 아무리 공부해도 그의 신학적인 결론만을 인용하는 것 외에 더 이상 칼빈을 닮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7. 메마른 신학
단지 공부만 열심히 하고 도무지 신앙의 깊이와 뜨거움이 없는 신학자들을 가리켜서 ‘메마른 학자’(dry scholar)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신학적인 지식과 신앙이 아름답게 연결되어서 하나님 교회의 영적인 자산이 되고, 또 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인 삶과 신앙을 풍요하게 하는지 그 실천(praxis)을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신학의 지식과 신앙생활을 분리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 사역에 들어간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학문에 있어서 실용적인 특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신학함의 신앙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신학 자체를 배우는 것과 함께 어떻게 신학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거룩한 은혜와 하나님께 대한사랑이 깃든 경건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고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23:26)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사랑의 정서가 깃들인 경건에 바쳐진 마음을 달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태도인 ‘경외’(敬畏)는 두려움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그리고 이 두가지 모두 사랑과 열정이 있는 ‘경건’을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이다.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랑의 정서가 깃든 경건 없이 종교적인 의무만을 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더욱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암5:23-24, 신 10:12).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의 정서를 세상에 빼았기기를 원치 아니하시며 그것을 독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모든 정서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받게 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구원의 계획도 성취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