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학은 거룩한 감화와 결별하는가
칼빈을 공부하고 그의 가르침을 존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닮은 후예들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그의 학문적인 결론을 이용할 뿐이지 그의 글과 학문에 의하여 감화받는기회로 도무지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학적 열매가 자기화되기 위해서, 그에 관해서 공부하는 사람 자신이 칼빈이 잠겼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칼빈의 설교와 주석들을 단지 성경 해석을 위한 사전이나 단어장처럼 활용하기를 그치고 그가 행한 말씀의 풍부한 해설들이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명성에 영향를 미치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잘못된 성경 지식뿐 아니라 그릇된 신학함의 태도부터 고쳐줄 것이다.
단지 논쟁거리가 되는 성경 해석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의 글이나 주석을 대하기 때문에, 칼빈은 ‘또 다른 칼빈들’을 형성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환영받는 책이나 글 가운데 거룩한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매우 적다는 것도 개혁자들의 사상을 환영하면서도 그들의 영성을 본받지 못하는 또 한 가지의 이유이다.
한 예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론’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기도에 관한 그의 해박한 이론들이 다른 모든 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지 학문적인 탐구의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일촉즉발의 교리 논쟁의 시대를 살면서도 모든 교리를 교리 자체가 아니라 거룩한 삶의 실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만을 차갑게 들려주는 신학적 정보로 가득찬 책만 대하지 아니하고 읽을 때 마음이 뜨거위지고 거룩한 열심이 촉발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리를 향한 신념이 더욱 견고해지는 책들을 통하여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해박한 신학 지식을 섭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신학함이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거룩한 감화는 오직 거룩한 은혜의 기름 부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더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우러나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예쳐럼 살고 싶어하는 신령한 소원들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한다. 모든 책을 읽으며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책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신학함을 배우는 토대로 삼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말씀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훌륭한 설교자들은, 신학 서적이나 경건 서적의 진가를 측청함에 있어서 그 책을 공부할 때 받은 거룩한 감동의 정도를 기준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기준을 가지고 독서를 하도록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조지 횟필드(George Whitefield)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쓰여진 책, 저자 자신과 그들 작품 위에 ‘그리스도와 영광외 영이 임재한’ 저작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횟필드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 점에 있어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충고이다.
“그들은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저술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죽었으나 그들은 그들의 저술을 통해 지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예언의 영을 빙자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저술들은 오래 생존하고 많은 사람들이 계속 찾으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현대식으로 화려하게 쓰여지고 값싸게 장식된 저술들은, 성경적 표준에 가장 가까운 저술이 무엇인지를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의 평가 앞에서는 점차 쇠잔해지고,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14. 맺는말
수고와 슬픔, 계속되는 질병과 과중한 일들, 연속되는 긴장과 시련에 시달려온 인생을 마감하는날, 칼빈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제게서 들은 교리들을 경솔함 없이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가르쳤으며, 순수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책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1564년 5월 27일의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척박한 영적 현실은 이제 ‘세뇌된 칼빈주의’가 ‘경험된 칼빈주의’를 원한다. 목회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진리를 아는 체험이 가져다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함’ 때문에 칼빈의 신학적인 결론에 동의하는, 하나님을 아는 칼빈주의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는 그의 학문과 함께 독특한 신학함을 회복해야 한다. 학문적인 탐구의 과정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되고, 그 열매가 하나님을 향한 송영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