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שָׁלוֹם עֲלֵיכֶ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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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02 18:14
칼빈의 언약 사상 이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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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gopeace
조회 : 394  

칼빈은 되풀이해서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산산조각 내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의롭게 되어진 자들은 주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로 그들의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분명히 동등하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실한 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절단된 믿음으로 그리스도 분열시키지 않도록 그가 우리에게 이 목적을 주신 것 같이, 칭의 만이 아니라 성화를 위하여 그를 품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가 조각나도록 뜯겨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대적으로 지각하는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말하자면 의로움과 성화이다. 누구든지,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 안으로 받아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동시에 양자의 영을 수여하신다. 그(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이미지로 개조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단지 의로움과 성화에만 관계되어짐으로 우리가 이것들에 머물도록 하자. 비록 우리가 그들을 구별할 수는 있겠으나 , 그리스도는 그 자신 안에서 둘 다를 불가분하게 함유하신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을 얻기를 원하는가? 당신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의 성화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짐이 없이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조각들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이 유익들을 즐기도록 주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둘 다를 동시에 수여하신다, 그 (중의) 하나를 결코 그 다른 것 없이 (수여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일들 없이는 아니나 그러나 일들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님이 어떻게 사실인지 분명하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참여함에 있어, 틀림없이 성화도 의로움만큼이나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은 그러므로 구원의 유익들을 구성하는 것을 돕는다. 칭의와 성화의 두 가지 언약적 유익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은 나누어질 수 없이 관계되었고 그리고 동시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왜냐하면 둘은 이 큰 구속의 유익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칼빈에게 그의 신학적 대적자들을 대항하여 휘두를 좌우에 날선 검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생각했던 가톨릭 교도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없는 선행을 여전히 정결하지 않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관계업시 자신을 영적으로 정결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도덕폐기론자는 중생에 있어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불가분성을 직면하게 하였다.

 

칼빈으로부터 지금까지 언약의 두 유익들의 상관성에 관하여 우리가 논의한 세 가지 요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구별되어야 한다.

2.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3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떨어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연관성에 대한 칼빈의 네 번째 요점을 고찰하도록 하자. 


4. 칭의와 성화는, 당신의 손들처럼, 논리적으로 순서적이다. 혹은 칼빈의 용어들로 말한다면,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 아니다. 칼빈의 네 번째 요점은 은혜 언약의 두 유익은 논리적으로 순서적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언약의 한 유익이 주도적이고 다른 것은 종속적이다. 이것 역시 우리의 두 손과 같다. 만일 오른손잡이면, 오른손이 왼손 위에 주도적인 손이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칭의가 항상 성화 위에 주도적이고 그리고 성화는 항상 칭의에 의존적이고 그리고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오른손잡이라면, 이것은 그의 오른손, 즉 그의 칭의의 손이 최우선이고 그리고 그의 왼손, 즉 그의 성화의 손은 그 오른손에 의존적이고 그리고 종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한 사람이 "나는 내가 용서받은 것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많은 선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다. 대신에, 한 사람이 "왜냐하면 내가 용서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살 수 있고 그리고 살 것"이라고 말하여 야만 한다. 칼빈은 칭의를 집의 기초로 비교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화를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구조물로 비유했다. 따라서 성화의 집은 항상 칭의의 기초에 의존되어 있다.

 

칼빈은 실제로 중세 전통에서 온, 말하자면,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지 않다"는 한 중요한 금언 사용한다. 이 문맥 안에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인 믿는 자의 순종으로 인한 의로움은 구원의 대안적 혹은 반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화는 칭의 안에 그리스도 순종의 더 큰 의로움 아래 있거나 혹은 (그것에 대하여)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성화 의로움은, 비록 믿는 자 안에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은혜롭게 생성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 안에 수여된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종속적이다.

 

그래서 성화는 믿는 자를 위한 구원에 대하여 맞서는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성화)은 항상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하여 열등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화 의로움 칭의 의로움을 존중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의 존재가 칭의 안에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우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화는 칭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혹은 용서함에 있어 칭의의 사역 혹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전가함에 있어 칭의의 사역에 어떤 역할도 가지지 못 한다.

 

누구도 그 자신의 새로운 순종 혹은 성화를 결코 의존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존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유추로 돌아가, 성화의 의존적 손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붙잡는 칭의의 우위의 손을 항상 의지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칼빈의 언약교리는 언약의 축복들이 믿는 자에게 수여된 후에 율법이 복음에 반대되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는 구원의 신적 유익들의 필요한 구성요소들이다. 이 둘은 "동시에" 수여된다. 그럼에도 그 둘 사이에 묵과해서는 안 되는 논리적 순서가 존재한다. "영"이 율법의 "의문"에 더하여 짐으로, 믿는 자는 순종의 참된 의로움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종속하는 의로움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반대적인 의로움은 아니다. 칼빈은 이 원리를 그의 "트렌트 회의에 대항하여"에서 단언한다.

 

우리는, 참으로, 믿는 자들을 매일 선행을 더욱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장식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선행들은 때때로 의로움의 이름에 의하여 구별되어진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선행의 가치는 다른 어떤 기초보다 은혜로운 용납에서 기인되어야 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것이냐! 왜 그들은 그들이 소년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 종속적인 것은 반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은 자유 전가에 의한 것임을 나는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다른 유익이 나오는데, 말하자면, 우리의 행함들은 의로움의 이름을 가진다고 나는 말한다. 요컨대 나는, 우리 자신들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의 인격들과 행함들은 의롭게 되어진다; 그리고 행함들의 칭의는 원인에 결과(가 주어지는 것)처럼 그 인격의 칭의에 의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 말마암는 의로움은 순서에 있어 그렇게 앞서며 그리고 정도에 있어 탁월하며, 어떤 것도 그것 앞서 갈 수 없거나 혹은 그것을 모호하게 할 수 없다.

 

칼빈은 다시 그리스도인의 선행으로 인한 의로움 믿음에 의한 의로움에 대한 종속성을 설명한다. 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우리가 얻는 의로움과 우리에게 갚없이 수여하는 의로움은 최상의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래서 자주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지고, 그것만이 빌을 발하여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방법 안에서 행함의 의로움이 어떤 정도로 그것이 우리 안에 존재할지라고 그 자체의 위치로 축소되어짐으로, 말하자면, 절대로 다른 것과 충돌이 되도록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행함의 의로움이 믿음의 의로움에 의존하여야 하기에 그것(행함의 의로움)은 반드시 믿음의 의로움에 종속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칼빈에 있어 언약은 강력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믿음 만으로 의롭게 되어지는 것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들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에수님은 구세주와 주되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한 직설법(우리가 의롭다)은 칭의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명령법(우리는 의로워야 한다)은 성화 안에 있다. 우리가 본대로 이 두 강조점은 언약 공식 안에 내포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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