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참 하나님 삼위가 하나라는 중거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는 가장 결정적인 구절은 마태복음 28:19절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고 우리말 성경에 번역되었으나 이 말만 가지고는 내용을 어렴풋이 알수 있을 뿐이고 변증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원문에 있는 중요한 관사들이 모두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사의 사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한 아버지, 한 아들, 한 성령” 로 번역된 것이 아니고 그냥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28:19에서는 상부 성자 성령이 서로 각각 다른 사역을 하면서도 같은 하나님의 3위임을 입증한다. 중요한 단어는 1) "이름“ 이란 단수 단어를 사용한 점,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란 구절에서 원문인 헬라어 (UBS text) 에서는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등 영어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가 각각 그 앞에 정관사(定冠詞)를 동반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럼, 이제 이 두 가지 각도에서 본문 마태복음 28:19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극히 성경적인 교리임을 입증해 보자.
첫째, “이름으로” 라는 구절에서 “이름” 이라는 단어(onoma)가 단수 명사라는 점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아무 관계없는 삼자라면 마땅히 복수 명사인 “onomata"를 사용해야 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수 명사를 써서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로 묶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일체 (一體, oneness)임을 입증한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란 구절에서 원문에는 “아버지”란 말 앞에 정관사 (남성 단수 관사인 ho의 소유격인 tou) 가 붙어 있고, “아들” 이란 말 앞에도 역시 정관사 (tou) 가 붙어 있고 “성령” 이란 단어 앞에도 역시 정관사 (중성단수 정관사인 to의 소유격 tou) 가 붙어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 성경기록자(마태) 가 정관사를 매번 세 번 반복해서 썼을까? 아니,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성경을 기록하셨을 때 (딤후 3:16), 왜 마태복음 28:19에서 이렇게 삼위 앞에 각각 정관사를 반복하도록 기록했을까? 영어 문법 (English Grammar)에서도 관사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가령 “a woman with a child” 와 “a woman with child는 서로 의미가 아주 다르다. 부정관사 “a" 가 있으면 ”어린애를 대동한 여인(a woman accompanying a child)” 이란 뜻이고, 부정관사가 없으면 ”임신한 여인(a pregnant woman)“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어보다 문법이 발달한 헬라어에서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19에는 성부가 따로 인격체로 계시고, 성자가 따로 인격체로 계시고, 성령이 따로 인격체로 계신 것을 나타내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Sabellius 의 양태론 (樣態論,Modalism)은 성경으로 따져 본다면 설 자리가 없는 분명한 이단(異端, heresy)이 되는 것이다. 즉 세분의 위(位)가 계시는데 그 삼위가 각각 독특한 인격으로 한 하나님 안에 계신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삼위는 세 사람이 각각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하듯, 그렇게 사역하는, 삼위 하나님이 각각 자기 나름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고 조화를 이루어 사역하신다. 만일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 이란 단어 각각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무슨 뜻이 될까?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세가지 칭호이다” 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Sabellius의 양태론 이라는 무서운 이단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으로 입증하기보다는 그냥 믿어 두려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도로서 “하나님의 주권사상” 과 “성경의 권위”를 의심없이 믿는다면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요긴하게 교훈하는 정수적(精髓的) 교리 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느 개인이든지, 어느 집단이든지, 어느 교회든, 어느 교단이든지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이단이다. 성경이 이렇게 한 분 하나님에 삼위가 계심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지만 어떻게 한 분 하나님에 삼위가 계신가하는 것은 신비에 속한다.
삼위일체의 강의에서는 어거스틴의 에피소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 교리를 몰라서 고민하면서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니는데 어떤 사내애가 물통을 들고 여기 저기를 뛰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호기심에 어거스틴은 무엇을 하느냐고 어린이에게 물었더니 그 어린이가 하는 말이, “여기 구멍을 파 두었는데 바다의 물을 모두 이리로 옯길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어거스틴은 순진한 동심(童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냥 지나쳤지만 얼마를 걸어가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무릎을 쳤다. 그때 어거스틴이 깨달은 진리란. “내가 볼 때 저 어린애가 하는 짓은 무모한 짓이지만, 내가 삼위일체 교리를 논리적으로 풀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 어린애가 바닷물을 떠서 모래 구덩이에 옮기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