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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06 07:21
칼빈,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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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gopeace
조회 : 435  

칼빈,어디로 가고 있는가?

Quo vadis, Calvine?

 문병호 교수(총신대)



돌아감, 극복, 혹은 돌아감으로 극복하기

 

1. 들음으로써 

필자는 기독교 강요를 가르치면서 칼빈의 신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실감한다. 가득한 강의실의 후미진 곳에서 몇 몇 학생들이 청강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듣고 있다. 그들은 진정 칼빈을 듣기를 원한다. 칼빈이 대안인지, 근본인지, 돌아갈 곳인지, 아니면 그곳을 이미 우리가 거쳐 나온 것인지, 묻지 않는다. 그들은 칼빈을 극복하고자 하는가? 돌아감으로, 아니면 그냥 넘어섬으로? 

우리는 한 번이라도 칼빈을 진지하게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의 신학을 서너 개의 진술로 우리의 작은 메모장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그냥 우리가 정의하는 몇 가지 조목대로 칼빈은 존재해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의 당위성에 우리가 기초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그의 당위성이 확보되지 않았는가? 칼빈의 신학을 통해서 성경적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들은 질문하기 전에 듣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개개인이 칼빈 신학에 정초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므로. 

다만 명증한 것은 우리가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들음은 감동이며 움직임이며 변화이고 죽으므로 사는 것, 곧 회개며 중생이다. 칼빈이 즐겨 사용하는 어구인 경건의 체험(experientia pietatis)에 문의해 보자. 과연 눈물 없이 칼빈을 읽을 수 있는가? 달리 말한다면, 과연 눈물이 없이 칼빈을 읽은 사람이 칼빈을 말할 수 있는가? 

 

2. 자리매김: 진리와 개혁 

칼빈을 논외로 개혁신학을 논함이 불가함은 자명하다. 오늘날 인구에 회자하는 개혁신학이라는 말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곳에서 흥왕했던 특정한 신학적 경향 혹은 사조를 특정해서 지칭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이라는 말은 오히려 귀납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는데, 이를 ‘개혁적 신앙을 개혁적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 마땅한 신학’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필자는 이를 ‘칼빈의 신학에 기반하고 이로부터 유래한’이라고 또한 잠정적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성경적 칼빈신학의 진실성과 부요성에 대한 필자의 확신으로부터 기인한다. 

‘칼빈의 신학에 기반하고 이로부터 유래한 신학’이라는 개혁신학의 정의의 적합성을 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칼빈신학의 성경적 적합성에 대해서 문의(問議)하여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혁 신학의 요체는 네 가지 모토로 개설(槪說)된다: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네 가지 모토는 서로 기대고 있으며 의미상 분리될 수 없다. 예컨대 다음 고백은 이 네 가지 모토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 

루터는 이 네 가지 모토를 주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던 성문 문짝에다 내건 95개 조항은 썩은 수사들의 구체적인 행태에 대한 구체적인 질책을 넘어서서 ‘진리와 자유’라는 성경적 원리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마다 구원에 이른다. 이 진리로 자유케 된 사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주의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핵심이었다. “Christianus homo omnium dominus est liberrimus, nulli subiectus. Christianus homo omnium servus est officiosissimus, omnibus subiectus.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을 가장 충실하게 섬겨야 하는 종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종교 개혁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역설이 아니라 성경적 계시로 수납(受納)한 참 기독교인들의 참 교회(ecclesia vera) 운동에 다름 아니다. 참 교회는 구성상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무리로서, 구조상 그리스도를 머리(caput)로 하여, 기능상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상기한 종교 개혁의 네 가지 모토가 루터로부터 발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적 진리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에 비추어 철저히 성경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예컨대 칼빈이 신학 작품들과 주석이나 설교 등에서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읽기에 충실함으로써 성경의 문자적-역사적-영적인(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인) 의미를 추구함에 있어서 성경 원저자(auctor originalis)의 뜻을 원래대로(originaliter) 밝히기 위해서 성경을 구절대로 해석함에 역점을 두었다면, 루터는 주제 중심의 강해에 치중해서 시종 지나치게 예표론적인(typological) 해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경향은 루터를 계승한 멜랑흐톤과 부써와 쮜리히의 쯔빙글리나 불링거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칼빈 신학의 고유성을 논함에 있어서 오직 그만이 참으로 sol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했던 신학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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