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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7 00:46
펠라기우스의 포로된 교회 / R. C. Spr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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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gopeace
조회 : 529  

펠라기우스의 포로된 교회 / R. C. Sproul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는 "바벨론의 포로된 교회"라는 소책자를 집필하였다. 당시 로마교회를 바벨론에 비유한 것인데 이것은 성경적 진리를 거부하는 로마교회는 단순히 오류를 범한 교회가 아니라 이방 침공 세력이라고 비판한 것이었기에 적지 않은 반향을 가져왔다. 만일 루터가 현대 복음주의 교회를 본다면 또 하나의 책을 쓸 것인데 그 제목은 아마도 "펠라기우스의 포로된 복음주의 교회"일 것이다.

루터에게 이신칭의란 종교개혁의 5-solas,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모두와 밀접하게 연관된 교리였다. 특히 오직 은혜야 말로 이신칭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이며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하는 책이 바로 "노예 의지(On the Bondadge of the Will)"라는 유명한 작품이다.

루터는 이 책에서 죄인이 가진 자유의지란 오로지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속박된 의지이기 때문에 이런 죄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칭의를 획득하기 위해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이 아니다. '오직 믿음'은 '오직 은혜'라는 기초 위에서 바라볼 때에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 때부터 이어져온 교회의 정통 가르침이며 다른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때로 이견을 보이기도 한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도 루터가 말한 바 '노예 의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핵심 단어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오히려 '오직 은혜'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이 점에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탈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위해 99%를 하십니다. 이제 마지막 1%를 이뤄야만 합니다." 빌리 그래엄의 말이다.

 

펠라기우스주의란 무엇인가?

펠라기우스는 5세기 영국의 수도승이며 동시대 인물인 어거스틴에 대적해 자유의지에 대해 교회사에 길이 남을 논쟁을 벌였다.

어거스틴은 역사적으로 모든 정통 교회가 보존한 원죄의 교리를 가르쳤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원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었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선천적으로 부패하였고,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 가운데 태어난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을 뿐 후손과는 관계 없다. 죄책이나 오염은 후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최초의 아담과 같이 무죄한 상태로 태어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는 데 하나님의 은혜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의지에 대한 입장차가 발생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전 존재가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게 선택하지만 그 의지는 악한 본성과 경향성에 속박된 의지이다. 반면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를 발휘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교회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도가 지나치기 때문에 이보다 완화된 반(半, semi, half)펠라기우스주의가 등장한다. 그들은 원죄의 존재를 인정한다. 원죄로 인해 인간의 능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약화되고 노예처럼 변했지만 그 중심에는 아직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의로움이 남아있다. 구원과 멸망은 바로 이 남아 있는 의로움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천리길을 오셨을 때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는 우리가 내딛는 마지막 한 걸음에 의해 결정된다. 반펠라기우스주의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6세기의 교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따라 인간의 의지에는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에 협력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배경 중 하나이다. 모든 개혁가들은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생이라는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믿기로 선택하여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믿을 수 조차 없다.

 

복음주의와 믿음

거의 모든 현대 복음주의자가 중생하기 위해 우선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미국 기독교인의 70%는 사람이 원래 선하다고 믿는다. 80%의 기독교인들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가 아니라 펠라기우스주의이다.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가슴에는 펠라기우스주의가 박동하고 있다. 교회는 펠라기우스에게 점령 당했고 포위 당했다. 이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은 세속사회가 아니라 바로 교회 안이다. 기독교 TV와 라디오가 이 메시지를 전파한다.

19세기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부흥사가 있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주장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펠라기우스주의도 거부했다. 그는 온전히 펠라기우스주의자였다. 타락과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정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온 힘을 다해 부정했다. 우리 안에는 의로워질 능력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찰스 피니(Charles Finney)이다. '오직 믿음'이 기독교가 서고 넘어지는 진리라고 말한 루터의 말이 옳다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대속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한 개혁자들이 옳다면 찰스 피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 교회는 그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전도자라 말한다. 20세기 기독교는 찰스 피니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남은 의(義)

20세기 미국 교회를 이끈 복음주의자들-예를 들어 빌리 그래엄-은 원죄와 타락, 은혜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펠라기우스가 아닌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왜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반어거스틴주의라 부르지 않는지 생각해 보라. 결정적 차이는 '노예 의지'에 대한 견해에 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원 얻는 믿음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대가 던져졌다. 수 차례 물에 잠겼다 떠올라 거의 죽게 된 사람의 손 옆에 구명대가 놓였다. 이제 손가락으로 그것을 잡기만 하면 된다.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이 있다. 거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약을 주어도 입을 열 수 없기에 스푼으로 입에까지 넣어준다. 이제 마지막으로 삼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실일까? 

그러나 실상은 반대여서 그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셔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원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루터도 자신의 책 "노예 의지"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는 별개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에 이르는 길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장애물과 위험, 특히 마귀의 강력한 훼방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노력은 허공을 치는 주먹과 같이 한갓 헛된 수고가 될 뿐이어서 구원을 얻고자 했던 모두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의지가 있는가? 물론이다. 자유의지라는 말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기능을 의미한다면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라는 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 없이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택할 수 있다는 의미라면 그런 능력은 사람에게 없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휩쓸고 있는 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반펠라기우스적 견해이다.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칭의를 받는 하나님이 주신 수단인가? 아니면 칭의를 받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조건인가?

다음은 '오직 은혜'에 대한 강의 중 한 학생과 나눈 대화이다.

학생: 결국 어떤 사람을 중생시키거나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인가요?

R.C.: 그렇습니다. (학생은 매우 불편해 한다.)

R.C.: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학생: 네

R.C.: 당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구가 있나요?

학생: 물론이죠.

R.C.: 왜 학생은 그리스도인이고 그 친구는 아닌 거죠? 학생이 그 친구보다 더 의로워서 입니까? (그 학생은 "물론 내가 더 의롭기 때문이죠. 나는 올바른 결정을 했고 친구는 그러지 않았어요"라고 대답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내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학생: 아,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R.C.: 이유를 말해 보시죠. 당신이 친구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인가요?

학생: 아니요.

이어지는 대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15분의 대화 후 그 학생은 결국 "좋아요!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나는 올바른 일, 올바른 반응을 했지만 내 친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요점은 이것이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의 주류는 후자의 의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겸비하여 자신에게는 어떤 의도 남아 있지 않으며 구원을 위해서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쉬거나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기뻐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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