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의 기독교 교계에서는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그 아름다운 신학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John Calvin, Theodore Beza, Guillaume Farel, Francis Turretin, Williams Perkins, Williams Ames, Jonathan Edwards 의 신학은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사이비 개혁신학” 일색입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47)나 Three Forms of Unity(개혁주의 3대 교리), 즉 Belgic Confession (1561), Heidelberg Catecism (1563), Canons of Dordt (1619) 등을 제대로 따르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목회자들 자체가 이런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모르고 있고, 혹시 알고 있다고 해도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이런 신앙고백서는 기피하는 것이 오늘의 통탄할 교계의 현실입니다.
영국 옥스포드에 가보면 한 순교자의 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교자의 탑은 유명한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Thomas Cranmer, Hugh Latimer, Nicholas Ridley 가 모두 천주교 신자인 Mary 여왕의 손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 몸이 까맣게 거슬려 가는데 Latimer 목사가 같이 불 속에서 죽어가는 15세 연하의 Ridley 목사에게 한 말은 아주 유명하여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명언으로 우리 개혁 성도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고통을 이기기 힘들어 하는 Ridley 목사에게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고함질러 주위의 구경 나온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Be of good comfort, Master Ridley, and play the man. We shall this day light such a candle by God's grace in England as I trust shall never be put out."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리 개혁주의 성도는 이런 순교적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리들리 목사, 크게 위로 받으라. 그리고 남자답게 행동하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믿기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을 켜고 있단 말이요.”
아, 이 순교자들이 불에 타 죽으면서 켜 놓은 그 촛불 덕분에 지극히 적은 숫자이긴 해도 오늘날 개혁주의 성도는 아름다운 신앙의 진수를 누리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종교개혁자들이 되찾은 말씀,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힘써 지키는 일이 요즘은 아주 어렵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도일색이어서, 복음을 바로 전하고저 하는 사람은 소외되고 핍박을 받습니다. 기독교는 전대미문의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생명을 내걸고 무너져가는 돌담을 수축하고 이리떼들의 침입을 막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종교 개혁자들의 후손인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성경적 변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참된 신앙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서 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죄인에게 알게 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초림의 예수는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를 믿어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요3장).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한번 전해 준 그것으로 곧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enmity with God)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고 자기 뜻대로 살면서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롬1장).
변증학의 출발점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 (gnontes ton theon 롬1:21)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 졌다고 성경은 말한다.(엡4:24). 그러나 그 형상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은 직감적으로는(intuitively, 直感的) 알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 갈수 없도록 지(intellect, 知), 정(emotion, 情), 의(volition,意)가 모두 타락(墮落, corrupt)되어버려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조물주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한다. “믿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자연인(自然人, natural man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뇌리에는 두 가지가 작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속이는 일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탄의 지배아래 있음이다.
자연인은 누구나 “어떤 절대자(a certain Supreme Being)가 이 우주를 운행하고 있음을 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생사의 기로(岐路)에서는 ”하나님에게 귀의(歸依)한다. 이는 성경 말씀이 입증되는 증거인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롬1:21).
성경 원문에서는 분사형(分詞形, participular form)이므로, 늘 심성(心性, disposition)에 그런 생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또 한 가지는 사탄의 계교이다. 불신자나, 사이비신자는 모두 죄 아래 놓여 있는데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탄을 섬기면서도 영의 눈이 어두워서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믿을리 없고 그런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결국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마음속에 정당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는 생각이 일어 날 때, 그것은 바로 사탄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인은 로마천주교가 말하는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실상은 사탄의 사주(使嗾, instigation)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또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상례(常例)임을 알아야 한다.(고후11장).
그러므로 사람이 “믿기 싫다” 라고 할 때, 그것은 인류에게서 소망도, 믿음도, 사랑도 뺏어 가려는 사탄의 역사로 설명되어야 한다. 자연인은 그냥 내버려 두면 죽은 상태라서(엡2:1) 도저히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한다. 나사로는 주님이 불러 주실 때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덤에서 영영 나오지 못한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total inability to believe).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도학이나 선교학의 영역(領域, realm)에 속한다. 그러나 죄인의 죄인 됨을 알고 죄의 성질을 알고 접촉점(Point of Contact / Der Anknuepfungspunkt 接觸點)을 찾는 일은 변증학의 과제(Aufgabe)이다. 변증학에서 “접촉점” 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단지 전도자와 피전도자 간에 존재하는 이해관계의 공통점이나, 혹은 사상의 공통점을 말함이 결코 아니다. 변증학에서 접촉점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次元)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접촉점(Point of Contact / Der Anknuepfungspunkt)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Image of God is marred due to sin of Adam, the representative of human race)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가 인간의 완전 타락(total depravity of humankind)을 말할 때, 구원에 관한 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성(理性, reason)을 사용한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은 타락한 인간의 영역 내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타락한 사람(자연인)도 불쌍한 사람을 구제할 능력이 있고,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을 구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Pelagius, AD360-422)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전연 타락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시편 58편, 시편 14편, 로마서 3장에서 인간의 완전 타락을 명백히 역설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trace of the image of God)이 있다. 그러므로 변증학에서는 그런 사람의 심성에 호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접촉점(Point of Contact / Der Anknuepfungspunkt) 이다.
성경은 로마서 5:14절에서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에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도 왕 노릇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논리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원인은 무엇인가? 죄이다.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이다.(Sin is violation of God's Law). 그런데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하나님의 법이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모세부터이다. 그러면, 로마서 5:14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 판에 새긴 율법, 양심의 법을 말한다. 인간은 도덕적인 피조물(moral being)로 태어난다. 자연인도 사람을 죽이면 그것이 잘못인 것을 안다. 어떻게 아는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아는가? 아니다, 스스로 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법이 그의 마음 판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에게 있고,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에 그의 신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할 수 없다“ 고 로마서 1장에서 말하고 있다.
기독교 변증학의 목적은 기독교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있다.(Defense of Christian Religion).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자연인에게는 아무리 그럴싸한 말(plausible argument)이나,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논쟁(academic and logical argument)을 해도 그들을 영적 파산(spiritual bankruptcy)에서 건져 내올 수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반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Non-existence of God)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논리적으로 입증하면 그것이 진리인가? 1+1=2 라는 공식은 흔히 수용된 수식(數式)이지만 ‘1+1’ 이 반드시 ‘2’ 라는 값이 나오지 않도록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론이 결국 무엇을 입증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그러므로 재래식의 변증학의 접근방법은 의미를 상실(喪失)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반틸(Van Til)이 주장하는 전제론(Presuppositionalism)에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다른 외부에서 물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지양(止揚)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한 인간의 심성에 호소하게 된다.
변증학이 중요한 학문인가? 꼭 필요한 학문인가?
변증학은 주로 주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동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의 모든 분야가 모두 동원된다.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Queen of Sciences)이라면 변증학은 모든 신학의 왕자(Prince of Theology)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변증학에서는 주경신학과 조직신학 외에도 역사 신학, 실천 신학 등이 동원된다.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는 1812년 당시 미국에 존재하던 유일한 장로교단인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약자 PCUSA)의 총회의 결의로 중앙에 강력한 신학교를 하나 세우기로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세워져서 100여년을 충실하게 칼빈주의로 학생들을 무장시켜 배출한 신학교이지만, 1910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자유주의 물결에 밀려서 어수선할 무렵, “장로교의 어머니“ 라고 불리던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로 어려움을 당할 떄 누가 변증학을 교수할까 하고 고심하다가 약관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에게 그 중책이 1923년 지워졌지만, 당시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 1924)등으로 시끄러울 때이어서 이를 만회해 보려고 반틸(Van Til)을 변증학부 부장 교수로 임명했으나 제대로 한번 가르쳐 보지도 못하고 1929년 많은 정통파 교수들이 교단(敎壇)을 떠나는 비극을 맞았다.
변증학은 비단 자연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밝히는 사명이외에도 기독교 신자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바로 알려 주는 역할을 할 필요성이 있다.(벧전3:15). 오늘의 교계는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가 되는 교훈을 하는 곳이 많다. “믿는다, Credo"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신앙”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엄밀하게 검토되지 않은체 막연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개념(concept of epistemology)을 재해석(reinterpretation)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처럼 이단적 교리가 횡횡하는 교계의 풍토 속에서 바른 신앙을 정립함에 있어서 변증학은 필수 요소(sine qua non)이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 Th.M. (신약)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