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독론 (Christology)
흔히 사람들은 성령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요한복음 15:26-27절에서 “성령이 나를 증거할 것이요” 라고 했으니 성령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강조하기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기독론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종파(似而非宗派,cultic sect)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기독론이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시다”란 정도로 끝난다. 그러므로 바른 기독론 정립은 바른 신학을 정립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다. 이런 면에서는 성령도 마찬 가지이다. 성령도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기독론에 대해서는 교회사를 더듬어 보면, 초대 교회 때부터 많은 교리의 오류(誤謬)가 있었다. 주로 기원 1-2세기의 이단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반대로 기원 3-4세기에는 “예수님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신학 움직임이 활발했다. 아리우스(Arius)같은 사람은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황제와 밀착된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그래서 결국은 콘스탄틴(Constantine)대제(大帝)의 주재로 AD 325년에 니케아 종교희의(Nicene Council)가 소집되어 결과적으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낙인 되어 교계에서 추방된 일이 있었다. 또한 기원 1세기의 케린두스(Cerinthus)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는데 그때 신성을 입었다가 후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한 것으로 보아 그때 예수님의 신성은 떠났다”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은 사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에 그리고 교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이른바 “영지주의”(Gnosticism, 靈知主義)의 강한 영향에 기인(起因)한다.
기독론을 말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의 비하(낮아지심)와 승귀(높아지심)를 연구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하(卑下, humiliation)는 우선 그의 성육신(동정녀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난과 죽으심, 장사됨 그리고 지옥에 내려가심은 그의 비하(낮아지심)에 속하는 일이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다. 1923년에 당시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북미합중국 장로교)의 목사들 대략 1,300명이 뉴욕의 어번(Auburn)신학교에 모여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목사고시에 필수로 하는 일을 배제하려는 운동을 하였다. 이것을 ‘오번 선언문’(Auburn Affirmation)이라 하는데 이들은 이것 말고도,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부활 등은 반드시 믿을 필요 없고 사람이 만들어 낸 교리이므로 그것들이 목사 고시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소동을 벌렸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오점이다.
프린스톤 신학교에 비화(飛火)된 이런 교리는 상당한 문제를 야기 시켰다. 1902년부터 교장직을 맡은 프란시스 패톤(Francis Patton)이 물러가고 후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로스 스티븐슨(J. Ross Stevenson)을 교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자유주의를 은근히 옹호하는 사람으로 결정적으로 프린스톤 신학이 좌경하는 기수(旗手)의 역할을 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저작된 것이 그레샴 메이첸(J. Grasham Machen)박사의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이라는 책이다. 지금도 이 책은 불후의 명작이다.
예수님의 승귀(昇貴, exaltation)를 보도록 하자. 먼저 그의 부활을 생각한다. 그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어도 성도들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6절 이하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겠고, 그리스도가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도 살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 고 말한다. 부활을,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다가 서늘한 무덤에 들어가서 깨어났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 잘못된 생각들이다. 예수님은 성경대로(고전15:2-3) 살아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승귀(높아지심)는 또한 그의 승천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40일간을 이 땅에 계시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전도를 권면하였고, 나중에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셨다. (행1장).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도 어떤 독일의 학자들은 예수님은 승천한 것이 아니라 감람산에서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라고 주장한다. 몰론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은 이땅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성경에서 예언한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 재판장의 자격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요즈음 신학계에 대두된 문제는 마리아를 ‘공동 구세주’로 하자는 생각이다. 로마의 바티칸(Vatican)교황청에서는 논란이 계속되는 듯하다. 마리아는 구세주가 아니다. 누가복음 1:46-48절을 보면, 마리아도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불렀다.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를 경배하거나 마리아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라는 말이 없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세 가지 미사가 있다. 흠숭(latreia)은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미사이고, 숭배(doulia)는 순교자와 천사들에게 드리는 미사이고, 숭앙(hyperdoulia)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미사이다. 성경은 디모데전서 2:5절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인간 예수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가? 마리아는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마리아의 승천설(Assumption of Virgin Mary)도 동정녀 무후 수태설(Immaculate Conception of Virgin Mary)도 성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만든 교리에 불과 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만 믿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주님”(호 퀴리오스, oJ κύριος, The Lord of lords)이다.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역을 믿으며 그가 내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과, 그가 이룩한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서 나는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믿고 그 은혜를 감사 감격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또한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생애 전부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취한다. 내가 사는 것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도 주를 위해 죽는다.(롬14장, 빌1:21-23). 바울의 생애는 예수님에게 이끌려서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내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1:23)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성도의 생애는 예수님을 구세주로만이 아니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생활 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 모든 생각하는 일과 하는 일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된다.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다른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힘쓴다” (고전10:31절 이하 참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성부께서는 죄에 빠진 인생들 중에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구원 얻을 사람들을 택해 주셨는데 그들을 위해서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일까?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모두 성경에서 예언하신 대로이다. 그의 동정녀 탄생도 예수님 탄생 전 700년전에 이사야 7장에서 예언하였고, 그가 만국을 다스리고 평강의 왕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오실 것도 이사야 9장에 예언했고, 그가 야곱의 12지파 중에서도 유다지파에서 나실 것을 창세기 49:10절에서 예언했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까지 미가서 5:2절에 예언했고, 그가 죽으실 것, 그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힐 것도 이사야 53장에 예언하였고 그가 부활할 것 까지 예언 되었다.(욥19: 25절 이하). 또한 은 삼십 냥에 팔릴 것도 스가랴 11:13절에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사야 53:5절에서 예고된 대로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시편 22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신명기 21:23절 말씀대로 우리의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나무”란 “십자가가”를 뜻하며,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우리들 죄인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말함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다.(고후5:21 참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로 돌아가신 것이다.(Christ's substitutionary death).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하여 제사법(Ceremonial Law)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그리스도) 의 성질을 가르쳐 주었다. 양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에서 나오던 마지막 날 밤, 애급의 장자들이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죽던 날 밤,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양의 피를 발랐기 때문인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이 무슨 효험이 있어서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을까?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는 장차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prefigure)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여 그의 백성을 구속하였고, 십자가상에서 순종하여 얻은 “의”를 그의 백성에게 전가 (impute,轉嫁)하고 또한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모두 그리스도에게 전가 (impute)하여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가 “의로움”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로 인하여 그의 백성을 죄가 있으되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서 “무죄”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기독론에 있어서 한 가지 부연할 것은, 히브리서 13:8절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느니라” 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대한 오해가 대단하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특수 은사의 지속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성경구절을 즐겨 인용한다. 그러나 성령의 특수 은사와 히브리 13;8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성경은 아무렇게나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인용하여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입증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다.
기독론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지금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안식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지성소에 강림하였는가? 안식교는 침례교 목사였던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가 1844년 10월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으나 예언이 빗나가자 다시 1845년 3월로 수정했으나 다시 빗나가자 엘렌 지 화이트(Ellen G. White)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재림하였으나 공중이 아니고 1844년에 하늘의 지성소에 오셨는데 거기서 지금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을 하는 중이라고 가르친다.
여호와의 증인도 비슷한 교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지성소에 강림하신 것도 아니고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계셔서 (행7장의 스데반 집사의 순교 기록을 보라) 장차 이 땅을 철장(鐵杖, Iron Rod) 으로 다스리시며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로 오실 분이다. 그날이 점점 가까워 지는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림은 분명히 도래한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나중에 종말론시간에 다시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으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두 번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오셔서 모든 믿는 성도들을 휴거(rapture)해 가고, 지상에 7년 대환난이 오고, 유대인들이 믿게 되고, 후삼년반에는 무서운 핍박이 오고 그리고 다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문자 그대로 다윗의 의자에 앉아서 1,000년간을 문자 그대로 통치한다는 신학이 있는데 이를 ‘세대주의 신학’(Dispensational Theology)라고 한다. 주님은 두 번 오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재림은 한번 뿐인데 그 날은 마지막 날이다. 그날은 지구가 불에 타고 새로운 천지가 전개되는 날이다.(벧후3:11절 이하 참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의 인성(humanity, 人性)과 신성(divinity, 神性)이 어떻게 설명되는가? 초대교회에는 여러 가지 이단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별개로 존재한다는 학설, 두 성품은 혼합되어 있다는 학설, 인성은 없고 신성만 있다, 혹은 신성은 없고 인성만 있다는 등 학설이 분분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조화되어 있다. 별개의 것도 아니고 혼합된 것도 아니다. (니케아 신경, Nicene Creed이나 아다나시우스 신경, Athanasian Creed 참고).
생각해 볼 문제:
1. 개혁주의적인 인간관을 논하라.
2. 개혁주의적인 기독론을 논하라.
3. 기독론에서 세대주의의 오류를 논하라.
4. 구세주와 주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5. 변증학의 중요성을 논하라.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 영문과 졸업,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목회학)Th.M.(신약학)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