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교회론 (Ecclesiology)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성도들의 총체적 유기체를 말한다.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는 무리 전체를 교회라 한다. 에클레시아 (ekklesia)란 말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카할 (קהל / qahal 또는 qarah) 이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회집을 말했다. 즉 “백성을 불러 모은다”는 말이다. (행5:11, 11:26, 고전11:18, 14:19 등을 참고).
교회의 성질을 본다면, 우선 천주교는 “가르치는 교회”(Teaching Church)와 ”배우는 교회“(Learning Church)로 나눈다. “가르치는 교회”란 물론 신부나 대주교 같은 성직자들을 말하고 일반 신도는 배우는 교회에 속한다. 이 둘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다.
천주교에서는 아직도 천주교의 조직 이외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그에 반하여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성질을 외부적인 조직에서 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에서 해석했다. 보이는 교회 건물이나 조직이 교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가 교회인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들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무리들이다. 개혁파에서는 교회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믿는 성도를 총망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
교회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논하는데 우선 교회를 1) 전투적 교회와 2) 승리의 교회로 나눈다. 전투적 교회란 이 지상의 교회를 말하는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신과 싸우고(자신의 정욕과) 또한 공중에 권세 잡은자(마귀)와 싸운다. 싸움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친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라고 하는 것이며
‘승리의 교회’란 이 세상에서 싸움을 끝내고 평안히 쉬는 하늘나라에서의 교회를 말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싸움이 없다. 이미 싸움은 끝났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승리의 교회에서는 기쁨과 축복만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계시록 11장의 말씀처럼 “두 증인의 구실”을 하면서 핍박도 당하고 환난도 당한다. 이것은 분명히 전투적 교회의 모습이다.
또한 교회를 “유형교회”(church visible)과 ”무형교회“(church invisible)로 구별한다. 유형교회란 자상의 교회를 말하는데 지상의 교회는 눈으로 불수 있다. 지상의 교회에는 구원 받은 자도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형교회에는 거듭난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는데 눈으로 불수 없으므로 “무형교회” 라고 한다. 사람은 누가 구원 얻었는지 누가 구원을 얻지 못했는지 알 길이 없다.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는 성례식과 말씀을 전하는 교회로 이 세상에 존재할 때 눈으로 볼 수 있으므로 유형교회라고 한다.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이 유형교회의 성원이 되지 않을 수 도 있다. 또 반대로 유형교회에 속한 사람이 무형교회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다. 로마 천주교는 유형교회만을 논하지만, 개혁파에서는 주로 무형교회를 논한다.
교회의 속성을 보자.
가) 교회의 통일성(Unity of Church)이 있다.
천주교는 전 세계에 교회의 기구를 확장하는 일로 생각하고, 개신교는 외적인 것 보다 내적인 영적인 면을 중시한다. 모든 성도가 하나로 뭉친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총체인 것이다. 이 모임은 지상에서 조직체를 갖고 있고 또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천주교처럼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같이 하나님의 권속(眷屬)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
나) 교회의 거룩성(Holiness of the Church)이 있다.
천주교는 교회의 신성(神性)을 외부에서 찾는다. 성도들의 내적인 거룩한 성품을 생각하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의 신성함, 도덕적인 교훈, 예배와 권징을 중요시한다. 한편 개신교는 성도들의 심령이 새로워져서 거룩해 짐을 중요시한다. 속사람이 거룩해 지면 겉으로 그 열매나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로마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상반되는 신성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로마 천주교는 외면적인 의식에 치중하고 개신교는 내면에 치중한다. 천주교는 의식에 치중하고 개신교는 실질면(實質面)에 치중한다. (formality as opposed to essence)
다)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 of the Church)이 있다.
여기서도 천주교와 개신교는 상반되는 차이를 보인다. 천주교는 유형교회가 전 세계에 확장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와 반대로 개신교는 무형교회가 보편화된 교회라고 주장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거듭난 성도들의 총체를 말한다.
이 밖에도 천주교는 사도성을 많이 강조한다. 그들에 의하면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근거는 마태복음 16장이지만 마태복음 16:16절 이하에 가이사라 빌립보에서의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는 그렇게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 반석” 이라는 말의 “반석”은 원어에서 “페트라”(petra)이며,. 여성명사이다. 여성명사가 남성인 베드로를 지칭 할 수 없는 것은 헬라어 문법의 기초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그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한 것이다. 과연 주님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아니면 세워 질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표지 (Marks of the True Church)를 연구하자
세상에는 “교회”란 기관들이 많다. 그러나 모두가 교회는 아니다. 모르몬교들도 그들의 모임을 교회라 하거나 성전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도 그들의 모임을 교회 혹은 왕국관(Kingdom Hall)이라고 한다. 기성교회에서도 교회라는 이름은 있으나 주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예가 많다. 참다운 교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교회의 세 가지 표지, Three Marks of the True Church" 라고 한다. 세상에는 ‘참 교회’ 와 ‘거짓 교회’가 있다. 참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이 있어야 한다.
1) 말씀의 바른 선포 (The Tru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가르치는 교회를 말한다. 성경의 기본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는 교회는 신실한 교회요 참교회이다. 세상에는 말씀을 읽어 놓고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다. 교회는 웅변장소도, 수사학을 과시하는 장소도, 연극처럼 웃기고 울리는 장소도, 사람들의 귓맛을 좋게 해주는 만담장소도 아니다. 교회는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힘 있게 전파되어 죽은 영혼들이 말씀을 듣고 살아나야 한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음악이나 만담이나, 미사구의 수사학의 나열로 되어 지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한다. (롬10:17을 참고). 또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감사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기독교는 말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고 배운 바를 행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성경 말씀에 더 가까이 개혁하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는 것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legalism)를 혼동한다.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켜 그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서 열심히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선행으로 구원 얻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지만 선행은 구원 받은 자의 믿음에서 나오는 자연발생적인 열매이다.(We are not saved by good works, nor by keeping His law, but by His grace alone, and our good works are merely spontaneous outcome of good faith). 그러므로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사람은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요한일서 3:9절은 이점을 분명히 가르친다.
2) 성례식의 바른 집례 (Right Administration of Sacraments)
성례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식’이다. 성례는 어떤 것이든 간에 말씀과 분리 될 수 없다. 말씀이 없는 성례는 성례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성례는 눈으로 보이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참 교회의 안수 받은 목사가 집례 할 것이며 준비된 사람들만 참여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23-30절은 준비 없이 혹은 무자격자가 성찬에 참여할 때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병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자신을 살피고”의 “살피고”는 원문의 도키마조(dokimavzw / dokimazo) 동사 이다. 이 말은 자신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고 또 참으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가를 확실히 점검하라“는 말이다. 성찬식에 준비 없이, 회개함이 없이,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세례 받은 사람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신앙고백하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기 때문이며 세례 받은 그 자체가 그에게 성찬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회개함이 없으면, 또 은밀한 죄를 짓고 있거나 재판에 계류중이면 성찬에 참여 할 수 없다.) 세례식도 마찬가지로 준비 없이, 즉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과 주님 되심을 모르고, 자신이 죄인됨을 모르고 세례 받으면, 그런 세례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세례는 속사람이 거듭난 것을 겉으로 표하는 예식에 불과하다. 성례식을 바로 집행하지 않는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3) 권징의 바른 시행 (Faithful Exercise of Discipline)
주님의 교회는 거룩하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 오셨다. 이 말은 주님의 교회가 죄를 마음대로 짓는 죄인들로 구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짓던 죄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빛을 받고 새로워져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도록” 선택된 백성이 되는 것이다.(벧전2:9). 교회는 “정결한 처녀”이다.(고후11:2).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딤전3:15). 그러므로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정결해야 하고, 거룩해야 한다.
고린도교회에는 규모 없는 자(unruly nominal Christians)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계모와 동거하는 불량배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교회에 권징이 없는 것을 매도(罵倒, rebuke)한다.(고전5장 참고). 마태복음 18:15절 이하에 보면, 교회에서 권징 하는 절차가 나타난다. 교우가 잘못하면, 처음에 권고하고, 안되면 두 세 사람 앞에서 권고하고, 안되면 당회에서 권고하고, 안되면 수찬정지(受餐停止, barred from partaking in Lord's supper), 안되면 마지막 단계는 출교(黜敎, excommunication)하라고 가르친다. 출교란 그 사람과는 일체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제하지 않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출교를 모두 두려워했다. 다른 교회에서 권징처분을 받은 사람을 권징 해제되기 전에 제3의 교회에서 받으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주님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어느 교회에나 해당되는 것이며 지상에 있는 교회는 모두 하나로서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늘의 기독교계(基督敎界, Christendom)에는 참다운 교회는 보기 힘들다.
교단은 하나씩 모두 진리의 복음에서 멀어져 가고 개 교회도 말씀을 순종치 않는 교회들이 늘어만 간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믿음“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원문에서는 텐 피스틴(th;n pivstin / ten pistin) 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니요 “성경적인 믿음, 즉 정해진 유일한 믿음(the faith circumscribed by the Bible)을 말함이 분명하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믿는자”가 아니다. “믿는자”는 얼마든지 있다. 누가복음 18:8절에서는 “믿는자”가 아니고 “믿음”을 말하고 있음은 아주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끊임없는 권징으로 이스라엘백성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지해 나갔다.
권징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면만 적용함이 아니요 교리면도 말한다. 교인중 부패한 교리를 직접 간접으로 전하여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리를 파괴하는 사람은 권징의 대상이 된다. 요즘은 수많은 사이비 종파와 사이비 성직자들이 만든 테이프나 책자들을 통해서 정통적인 신앙을 떠나서 변질된 신앙을 남에게 고취(鼓吹) 하는 일들이 흔한데 이것은 권징의 가장 큰 대상이 된다. 초대교회에는 이른바 “영지주의 靈知主義, Gnosticism)이라는 헬라의 이원론적인(dichotomic, 二元論的)사상이 있어서 교회에서 많은 말썽을 부려서 사도요한은 이들과 싸우기 위하여 요한일서를 기록했다. 권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다음의 성경구절을 참고하라. (마18장, 고전5:1-5, 계2:14-15 등).
교회의 정치형태를 알아보자:
1) 퀘이커 교도와 넬슨 다비 교도의 견해 (Views of Quakers and Darbyites)
이들의 주장은 지상의 외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모두 부패하여 성경과 거리가 멀어졌으므로 새로운 계시를 통해서 진리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 퀘이커(Quaker)교도는 대표적이다. 말씀의 선포가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 계시를 받으면 그것을 회중에서 전하므로 서로 은혜를 받는 식의 예배 형태를 갖는다. 다비(Darby)는 세대주의의 비조(鼻祖)로서 영국에서 플리머스 형제단 (Plymouth Brethren Movement)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에 1901년에 전승하여 세대주의를 심은 장본인이지만 (오늘의 세대주의는 많이 변했다) 처음에 다비(Darby)는 기성교회의 모든 치리 제도를 부정하였으며 목사의 설교도 성가대도, 성찬식도 모두 부정하여 루터가 주장한바 “만인사제”(priesthood of all believers)를 내세워 모든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돌아가면서 성례식을 집례 하였다. 교회를 잘못 이해한 소치이다.
2) 에라스투스의 견해 (Views of Erastus)
에라스투스는 교회란 정부의 간섭을 받고 정부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사회단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교회의 직원들은 성경만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뿐, 행정이나 치리는 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라가 교회를 다스리며, 치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됨을 인정치 않으며 교회가 독립되어 존재함을 인정치 않는다. 1643년부터 1647년까지 4년간 영국 London에 있는 St. Margaret 교회와 Westminster Abbey에 모여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를 만들 때 이들 에라스투파들의 방해로 예배모범을 만드는데 많은 방해를 받았던 일이 있었다.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서로 성경의 해석 방법이 달라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많은 지장을 초래함을 볼 수 있다.
3) 성공회의 견해 (View of the Episcopalians)
성직자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를 지도하도록 전권(專權)을 맡은 자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는 교회 정치나 치리에 전혀 관여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 성직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회를 치리하고 가르칠 특별한 직임(職任)을 받은자라고 주장하여 성직자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고집한다. 고로 성공회 사람들은 교회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니 교회에 분쟁이 생길 이유도 성직자에게 반대할 이유도 없이 평온 할 수밖에 없다. 성공회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말을 들어보기 어렵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일반 교인들이 간섭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문제시 (問題視) 되지 않는 것뿐이다.
4) 천주교의 견해 (View of the Roman Catholicism)
성공회(聖公會)의 제도를 고도로 발전시킨 형태로서, 교황은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Representative of Christ on the earth)이고 무오(無誤, infallible)하며, 모든 성직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이므로 성경의 교리를 해석하고 조정하며 또한 미사(예배)를 정하고, 교회의 정치를 책임진다. 천주교에도 불평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성공회와 같이 일반 성도가 교회의 정치나 치리에 관여 할 권리가 없고 교황만이 그런 권한을 갖고 있고 일반 성도는 복종하기만 하면 구원은 얻어지기 때문이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정적인 요소 즉 순종만 있으면, 다시 말하면,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assent)만하면 구원은 보장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로마교회의 구원관이기 때문이다.
5) 회중교회의 견해 (View of the Congregationalists)
회중교회는 그 이름 그대로 회중이 주인이다. 교회의 직원들은 그에게 주어진 일만 수행할 뿐, 교회의 정치나 치리에는 관여할 권리가 없다. 모든 행정, 정치 치리는 회중이 저리한다.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소위 통합계획(Plan of Union) 이라는 것이 있어서 회중교단과 장로교단이 같이 힘을 모아서 선교하자고해서 서로 강단교류를 하면서 얼마동안 성공하는 듯했으나 서로 다른 정치 체제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여 서로 갈라섰던 일이 있다.
6) 개혁파의 견해 (View of the Reformers)
개혁파들은 교회 정치를 어떻게 보는가? 극히 성경적이다. 원칙은 성경에서 유래하고 자세한 부분은 인간의 지혜로 결정된다. 다음은 교회의 정치에 대한 교혁파의 견해이다.
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권위의 근원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즉, 유기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인 교회(믿는 성도)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넣어 주신다.(요15:1-8, 골1:18, 엡1:10 등 참고)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의미는 그가 교회의 왕으로서 교회를 다스린다는 의미에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스린다. 성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 다스리듯, 교회라는 기관의 주인은 왕 되신 그리스도이시다.(마16:18, 요3:13, 엡1:20-23) 교회를 세우신 것도 그리스도요 교회의 법을 세우셨고, 직원들을 세우셨고, 직원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교회에 항상 계시고 직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나)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그의 권위를 행사 하신다.
그리스도는 폭력으로 통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신다. 모든 성도는 왕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왕이듯 그의 말씀은 절대적이며 절대적인 법이므로 모든 성도가 순종해야 한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았으므로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다)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그의 교회에 일정한 권세를 부여했다.
그리스도는 그가 교회에 부탁한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에 어떤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모든 교인들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부여하지만 특별한 권한을 성직자에게 부여하신다. 교회 임직자들의 권한은 교인들이 부여함이 아니다. 물론 교인들이 선출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권한을 그들에게 주셔서 교회 일을 하시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기 왕 되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이 없이 스스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백성위에 군임(君臨)하여 다스리는데 있다. (렘5:30-31).
라) 치리권은 각 지교회에 있다.
각 지교회의 치리권은 일차적으로 각 지교회에 있다. 즉, 지교회의 치리기관인 당회(堂會, consistory, session)에 있다. 당회에서 결정하지 못하는 일은 상급 기관(higher court)인 노회(老會, presytery, classis)에 상정(上程, overture)하고, 해결 못하면 대회(大會, synod)에 가고, 안되면, 최고의 치리기관(highest court)인 총회(總會, General Assemby)에 상정하여 문제의 해결을 본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교회 안에서 생긴 일을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는 것을 성경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고전 6장)
교회의 직원들을 보자:
교회의 직원을 칼빈은 목사, 장로, 교사, 집사(Pastor, Elder, Teacher, and Deacon)로 구분 하고 있다. 목사는 교회의 대표자이며 장로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목사는 강도권(right to preach)와 치리권(right to rule) 그리고 성례식을 집례 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장로는 주로 나이에 중점을 둔다. 구약에서는 나이가 든 사람으로 덕망이 있는 사람이 백성의 장로가 되었다. 장로는 강도권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장로와 목사가 모두 장로의 반렬(班列, order)에 속하지만 장로는 치리권을 가진다. 교인들의 교리를 성찰하고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어떤 경우에도 장로가 당회장이 될 수 없다. 주님은 교회의 책임자로 목사를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자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일한다. 교사는 성경을 가장 신실하게 가감 없이 가르치는 일을 한다. 집사는 그 이름이 디아코노스(diavkono", diakonos) 이니 만큼 ”먼지 속을 다니며 일하는 사람“ 라는 뜻이므로 교회에서 여러 가지 남모르게 궂은일을 하면서 교회의 일을 돕는 사람이다. 좋은 집사의 본보기는 사도행전 6장의 일곱 집사에게서 본다. 집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교회의 재정을 관할하고 교회의 살림을 돌보는 직책이다.
은혜의 방편을 공부하자.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말씀과 성례이다. 천주교에서는 말씀은 배제하고 성례만을 강조한다. 말씀은 스스로 존재 할 수 있으나 성례는 말씀 없이 존재의 의미가 없다.
1) 우선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을 보자:
“말씀”이라 하면, 성경을 말한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이 은혜의 방편임을 논하자면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함을 알아야 한다. 펠라기우스 같은 사람이나 계몽기(Period of Enlightnment)때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가 필요 없이 말씀만으로 사람이 회개한다고 했다. 즉 이성적으로 말씀을 들으면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여 예수를 믿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죄인의 마음속에서 회개하고 믿게 해 주신다. 말씀과 성령은 밀접하며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성령은 스스로 혼자서 역사함이 없고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 속에서 역사하신다. 현대의 문제는 성령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다. 말씀만으로 사람을 회심 할 수 없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되는 일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성령론은 거짓이다. 특히 인간의 구속사역에서는 반드시 말씀과 성령이 같이 동시에 역사 하신다. 믿음이 생기는 것은 들음에서이다.(롬10:17)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생명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롬8:15-16). 말씀 선포만으로는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성령이 역사하여 감화가 있을 때 가능해 진다.
말씀이 은혜의 방편이라고 할 때 우리는 말씀의 두 가지 면(two aspects of the Word)을 고려해야 한다. 즉 율법과 복음이다. 이것은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한다. 가장 혼한 오해는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 된다“는 생각이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준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율법이 없으면 복음을 이해 할 수 없고 반대로 복음이 없이 율법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사람들은 구약을 행위의 계약이라고 매도하여 도무지 상종하려 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구약은 아주 무시한 채 읽지도 않는다. (예: New Testament Apostolic Church 같은 교단). 주님은 율법을 철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to accomplish)오신 분이다. 율법 속에 복음이 있다. 반대로 복음 속에 율법이 있다.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복음시대에 사는 사람이 도무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도 말씀을 지키라는 말은 수없이 많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란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요한이서 6절, 요한복음 14:15, 21, 24 등을 읽어 보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복음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것을 명령하고 있고, 복음은 우리 생활에서 율법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율법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마5:17-19, 롬13:10, 엡6:2, 약 2:8-11, 요일 3:4 등 참고) 율법과 복음은 과연 서로 상반되는 것인가? 율법이 없다면 사람이 살아 갈 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십계명은 구약 율법의 세련된 집대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율법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가) 우리가 죄인 됨을 깨닫게 해주고 (롬3:20)
나)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하고 (갈3:24)
다) 성도들의 생활의 법칙이다 (시119:105)
복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구약은 오실 메시야가 구세주로 오실 것을 말한다.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으로 오신 것을 말하며 복음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나오라고 권하며 그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금생과 내세에 모든 축복을 약속한다.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2)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례식.
은혜의 방편은 말씀만이 아니다. 성례식(세례와 성찬)이 있다. 그런데 양자간에는 차이가 있다.
가) 말씀은 성례 없이도 은혜의 방편이 되지만 성례는 말씀이 없이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한다.
나) 말씀은 널리 전파되어도 성례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 된다.
다) 말씀은 믿음을 갖게 하고 믿음을 견고히 할 수 있지만 성례는 믿음을 낳게 할 수는 없고, 단지 믿음을 견고하게 할뿐이다.
성찬에 대한 네 가지 견해 (Hoc corpus meus est 의 해석문제)
1) 화체설 (transsubstantiation 化體說)
천주교: 성찬시 떡과 포도즙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
2) 공존설, 공재설 (consubstantiation 共存說, 共在說)
루터교: 성친시 떡과 포도즙 주위에 예수님의 몸과 피가 오신다는 주장.
3) 기념설, 상징설 (commemoration 紀念說, 象徵說)
쯔빙글리 및 아르미니안주의: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주장.
4) 영적임재설 (mystical representation 神秘說, 靈的臨在說)
개혁주의 견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스럽게 참여하는 자에게 임하여 믿음이 더욱 견고케 된다고 주장.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 영문과 졸업,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목회학)Th.M.(신약학)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