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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auto
 
작성일 : 19-07-08 03:37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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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창암
조회 : 490  

기독교의 지식 철학 (Christian Philosophy of Knowledge)

기독교의 철학은 지식에서 출발한다. 지식이란 단지 어떤 사실을 아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사실을 해석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진리에 도달 할 수 없다. 사실을 안다는 것과 사실을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접근해야 하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인들의 인생관을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을 논함에는 필연적으로 지식론을 말하게 된다.

신자와 불신자와의 인생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창조주를 경배하고 섬기며 반면에 불신자는 피조물을 숭상하고 섬기는데 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데 그가 타락할 때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 피조물을 숭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속 (救贖. redemption)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사람은 피조물을 섬기다가 이제 조물주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oe)라고 하는 말 가운데는 하나님이 비단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라는 말만 아니라 그는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우리의 생을 온전히 주장하시는 분으로 내가 어려울 때나 슬플 때나 나의 형편을 아시는 분이므로 내가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말이 내포(內包)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가 자신이 모든 사물의 판단의 기준이 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엄연하게 조물조로 계시고 세상을 주장하시며 세상을 판단하지만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것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매사에 그 자신이 모든 행위의 표준, 판단의 표준이 된다. 이것을 인간의 자행자지(human autonomy, 恣行自志)라고 한다. 가령 에덴동산의 사건을 보자.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지식을 자기의 지식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위(眞僞) 여부를 판단하려 했다. 아담에게는 절대적인 자유의지(free will)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지와 동시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물론 타락한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는 이런 자유의지는 없어 졌고, 모두 죄에 오염되어 하나님을 싫어하며 자기 생각에 치우치는 의지만 남았다. 그런 생각이 바로 서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의지로 변하는 것은 중생에 의해서 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 자신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동등시 했다. 권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치 않았다. 어떤 문제(issue)가 있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권위자가 있다. 어떻게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어떻게 아는가? 사람을 통해서 아는가? 그 사람을 경험하는가?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는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아는가? 권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그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권위를 직접 입증하신 분이라면 그 권위를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권위를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 自然啓示)를 통해서 나타내주셨고, 또한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特別啓示)를 통해서 충분하게 나타내 주셨다. 로마서 1:19절에는 “아무도 핑계 할 수 없으리만큼 분명하게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났다” 고 말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권위를 해석하는 사람이 그 권위를 액면 그대로 받지 않고 자신의 권위와 혼동하여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려는데 있다. 이사야 14:12절 이하에는 하나님을 옹위하던 천사가 하나님과 대항하여 결국은 타락하는 모습을 읽어 본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였으나 결정적인 선악과 문제에 있어서, 죽음과 생명의 기로(岐路, pivotal point)에서는 인간의 자율성(autonomy)을 발동하여 결국은 지식의 혼란을 가져 오고야 만다. 참다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 다른 모든 지식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따라서 어떤 지식도 표준이 될 수 없다. 변증학에서는 우선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생관, 바른 세계관 그리고 바른 지식을 갖는 일이 출발점이 된다.

1.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지식 (God's Knowledge of Himself)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시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전지(全知, omniscient)하신 분이다. 그는 자존(自存, self-existing)한 분이며 자족(自足, self-sufficient)한 분이므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며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결정하시는 분이다. 인간은 스스로 사건들을 판단하려 들지만 그 판단은 정확하지 못한데 이유는 인간은 지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은 전지(全知)하지도 못하며 자족(自足)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족하지 않으시다면, 또 그가 전능하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 다른 어떤 것이란 이 세상과 우주에는 하나님이 유일한 조물주이기 때문에 필연코 피조물을 말함임으로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존(depend)한다는 말이 되므로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에도, 그 어떤 것에도, 의존되지 않고 스스로 계신 분으로 자신을 자연과 성경에 나타내 주신 분이다. 또한 하나님이 그 어떤 것에 의존한다면, 그 “어떤 것”이란 영원성이 없는 이 세상의 잠정적(暫定的, temporal) 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2.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지식 (God's Knowledge of the World)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가?

여기서는 창조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로 인하여 창조되었고 하나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건물은 그 설계도(Blueprint)대로 세워진 후에 라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와는 동일시 할 수 없다. 범신론자(pantheist, 汎神論者)인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유대인으로 그의 범신론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유대교에서 추방된 사람, 1632-1677).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우주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주는 영원 전부터 존재 한다“라고 가르치면서 생각과 실제를 동일시 하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생각(idea)와 실제(reality)는 동일하지 않다. 스피노자는 하나님과 우주와 창조를 모두 같은 차원에서 본다. 현세를 보고 영원을 판단 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을 보고 현세를 판단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들의 판단의 기준이 현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보실 때 모든 사물의 판단의 기준은 영원에 있는 것이며 현세에 있지 않다. 하나님만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의 기준은 오직 스스로 계시며 자족하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시간에 제한을 받는 피조물이라면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무한한 영역에 속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불신자는 현실을 해석할 때 스스로의 지혜를 동원하여 하나님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해석하고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사물의 해석의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에게는 하나님 없이는 현실을 해석 할 수 없으며 현실이 무의미(無意味 meaningless) 하게 된다. 제한된 인간의 생각은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제한된 지식은 완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지식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세상을 자기 뜻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견줄 수는 없다. 엄격히 말하면 피조물과 조물주의 명확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던 천사는 추방되어 사탄이 되었다.(사14장).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존했던 아담과 하와는 타락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것이요 우주가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므로 세상은 하나님에게 필연코 의존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 (Man's Knowledge of God)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스스로 성경에서 그가 누구인가를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변증학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길은 어느 기적이나 이적을 통함이 아니요 성경 속에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성경에 계시된 것 이상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에 계시하였지만 인간이 그에게 관하여 알아야 할 것만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모두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넘어가도 안되며 성경에 계시한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지식이나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외면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제한을 받으며 하나님과 인간은 전혀 다른 영역(領域,realm)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신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신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케 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며 또한 생의 의미(meaning of life)를 부여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참다운 생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참다운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본분을 다 할 때 참다운 인생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진리를 알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다.(엡4:24, 골3:10).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요할 때 참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터득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신바 되었고 우리도 그를 알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빛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빛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가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전이다. (계21:22, 고전3:16, 6:19) 여기서 언급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바르지 못한 지식은 필연코 진리로 이끌지 못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데 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이비 집단(cultic sects)들의 공통점(共通點, common error)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유한(有限)한 인생이기 때문에,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는 지금보다 더 잘 알 수 있어도, 지금 현세(現世)에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이성(理性, reason)에 따라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이성에 따른 절대적인 이성의 종교이다. 이에 반하여 다른 비기독교적인 사상은 절대적인 비이성 사상이다. 비이성 사상(非理性思想, absolute irrationalism)은 정함이 없다. 변함이 무쌍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창조는 미리 하나님의 이성(理性)으로 계획되었고 또한 그 계획에 따라서 창조로 구현(具顯, materialize)되었다. 참 하나님을 알 때 우주를 바로 해석 할 수 있다. 그 참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이성으로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현해 나가시는 분이시다.

4.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 (Man's Knowledge of the Universe)

인간이 하나님을 보는 관점을 보았다. 이제 이 지식의 관점(Perspective in knowledge)을 통해서 인간은 우주를 어떻게 보는가를 생각하자. 인간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는 관점에 의존한다. 우주란 말은 하나님이 창조한 영역을 모두 포함하는데 그 안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가 우주를 아는 지식 중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앞선다. 인간이 있기 전에 어떤 환경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환경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를 해석하고 인간을 해석할 때 인간은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여 그가 만드신 우주를 인간이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있기 전의 환경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기원 3세기 신학자중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삼위일체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 양태론(樣態 論, Modalism)을 주장하였다. 성삼위일체중에서 각위(各位)가 하시는 독특한 일을 무시하고 성삼위의 구분을 두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속성(attribute)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성부는 모든 것의 근원이요, 성자는 지혜요 성령은 능력이라는 진리는 외면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인간이 우주를 바라 볼 때 배우는 우주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의 결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우주를 바라볼 때 그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우주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요 또한 인간이 우주를 보는 정확한 관점이다. 이처럼 기독교 변증학에서는 모든 것은 절대 주권을 가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건들을 해석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는 일이나, 우주를 해석하는 일이 필연코 정확한 평가에 도달 할 수 없게 되며 그 탐구(quest, 探究)자체가 무의미 해 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세를 바라 볼 때,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 속에서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 우주를 만드신 근본 목적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해도 하나님의 생각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우주가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의 지식 자체가 제한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과 연관 짓지 않고 사물을 바로 해석할 수는 없다.

5. 죄와 저주 (Sin and Curse)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 지식에 어떤 변화가 야기(惹起)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죄는 심각하다. 죄가 아니었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세상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나 죄 때문에 모든 것이 혼미해졌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는 죄를 짓기 전이나 죄를 지은 다음이나 변함이 없다. 인간의 죄는 사람의 지, 정, 의(知,情,意) 모든 면에 오염되었다. 인간의 지, 정, 의 가 모두 오염(pollute)되었다함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윤리 전반(全般)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의 범죄가 인간의 지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자.

사람은 무엇이나 그가 당하는 일을 하나님 없이 자기 멋대로 해석하려 한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이 인간의 지식에 미친 가장 해로운 영향이다.(most detrimental effect). 그렇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아주 부인하거나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계심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인간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족한 분이 아니며 또 온전한 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을 해석함에는 하나님이 필요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을 초래한다. 사물을 해석함에, 유신론에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해석이다. 즉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의 이성대로 행하시는 해석이 있다.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해석에 의하여 해석하는 해석이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비기독교적인 해석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해석한다. 하나님을 해석에 도입하면 하나님은 나의 해석을 돕는자로 여길 뿐, 하나님의 해석이 인간의 해석보다 우선(于先, priority)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에 인간의 자행자지(human autonomy)가 작용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창조주만을 경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어떤 이는 피조물만 경배한다. 그는 불신자이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생각과 신자의 생각은 항상 서로 상반되지 않을 수 없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우주 자체가 목적이며 우주자체가 궁극적인 존재이다.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와 극치(ultimacy)를 믿으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극치(極致, ultimacy)를 믿으므로 인간의 생각이 가장 우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해석에 있어서 인간 중심이 된다. 하나님의 해석 안에서 인간의 해석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신앙과는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이나 먼 거리를 두고 있다. 죄에 빠진 인간은 그의 생각의 정상성 (正常性, normalcy)과 궁극성(窮極性, ultimacy)를 믿고 의존하는데서 크게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벗어난다. 타락한 인간은 그들의 생각이 정상적이며 또 궁극성을 갖고 있다해도 자신이 실수 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실수는 그들에 의하면, 인간으로서는 정상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죄라고 믿지 않으면서 현실을 발뺌한다. 절대적으로 실수가 없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려고 하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진실에 대한 눈이 멀어 영적으로 파산 (破産, spiritual bankruptcy)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심성(心性,disposition)을 설명함에 있어서 세 가지의 의식(consciousness)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첫째, 아담의 의식이 있다.(Adamic Consciouosness).

사람이 창조 될 때 그는 완전했다. 그는 그가 창조된 피조물임을 인정했고, 피조물로서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피조물로서의 아담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이 해석한 것을 해석하는 심성(心性)이 있었다. 그는 주위의 환경에 순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했다.

둘째, 타락한 아담의 후예(後裔, posterity)의 의식이다.(Consicousness of Adam's Posterity).

아담과는 달리 이들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부인한다. 자신이 하나님 없이 정상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해석을 받아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 없이 자신이 멋대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에 자연의 빛(light of nature), 즉 양심의 빛이 마음 판에 새겨져 있어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긴 해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knowableness of God within them).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 가지는 못한다. 지.정,의 등 모두가 완전타락(total depravity)하여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은 남아 있어서 도덕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의 상대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

셋째, 중생한 의식이 있다.(Consciousness of the Regenerate). 

중생한 자는 타락전의 아담의 지위로 회복된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물론 중생한 영혼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중생자의 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가 죄인인 것을 알며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것은 순연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 타락전의 아담처럼 하나님의 해석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에 불과하다. 회심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회심한 사람의 마음에 아직도 옛 사람이 남아 있고 죄성이 기회만 있으면 폭발 하려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轉嫁,impute)되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어 그리스도의 의가 근거가 되어(ground of righteousness) 믿음에 의하여(믿음은 방편임)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법적인 선언이다.(God's forensic unilateral declaration in God's Tribunal Court).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이라해도 이 원칙에 조금도 위배됨이 없이 완전하게 죄 없이 살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된 것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도리를 불신자에게 알려 주어여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 영문과 졸업,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목회학)Th.M.(신약학)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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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1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7. 창암 07-08 491
396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8/19) 창암 07-08 318
3959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6. 창암 07-06 409
395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6/19) 창암 07-06 328
3957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5. 창암 07-05 426
3956 스펄젼과 함꼐하는 아침묵상(7/5/19) 창암 07-05 494
3955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4. 창암 07-04 502
395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4/19) 창암 07-04 337
3953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3. 창암 07-03 507
395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3/19) 창암 07-03 466
3951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2. 창암 07-02 489
395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2/19) 창암 07-02 317
3949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1. 창암 07-01 443
394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7/1/19) 창암 07-01 327
3947 왜 성령이 아니고 인문학인가? 창암 06-29 495
394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6/29/19) 창암 06-29 238
3945 인터넷과 그리스도인의 신앙문제 (끝) 창암 06-28 527
394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6/28/19) 창암 06-28 491
3943 인터넷과 그리스도인의 신앙문제 (1) 창암 06-27 499
394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6/27/19) 창암 06-27 486
3941 신학교 재정위기...대처방안은.. 창암 06-26 455
394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6/26/19) 창암 06-26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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