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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auto
 
작성일 : 19-07-09 05:57
Dr. 김명도의 (개혁주의 변증학)시리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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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창암
조회 : 531  

III. 기독교의 행동철학 (Christian Philosophy of Behavior)

기독교의 행동철학(philosophy of behavior)는 무엇인가?

             1. 기독교의 윤리관 (Christian Ethics)

우선 기독교의 윤리관을 보자.

첫째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생활이다. 고린도전서 10:31절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소 요리문답서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이라는 질문이 초두에 있는데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인간의 최고의 윤리는 “하나님에게 영광”(Soli Deo Gloria)이다. 죄로 타락한 사람들은 이 원칙을 모른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옛사람이 남아 있어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 어떤 분은 도덕 폐기론(道德廢棄論, antinomianism)을 주장하면서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도덕적인 선행은 소용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참으로 중생한 사람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선행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며 자신의 명예를 위함이 결코 아닌 것이다.

둘째로, 중생한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기준을 세울 수 없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된다” (시119:105).

셋째로, 인간은 중생자라도 죄인이므로 혼자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 할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데 믿음이란 들음에서 나지만 성령을 통해서 중생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생의 최고의 선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포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동기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도 유한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유래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선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인간은 중생했다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미완성품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선은 인간 자체에서는 기대 할 수 없으며 상대적인 선만 있을 뿐이다. 절대적인 선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불신자와 신자의 윤리관이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둘 다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동기가 다를 뿐이다. 불신자의 윤리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기준으로 행하는 선이고 신자의 윤리는 스스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해석한 것을 다시 해석하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불신자의 경우는 스스로 선을 창조하고 신자의 경우는 창조함이 아니오 하나님이 명하는 바를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행하는 것이 다르다. 또 한 가지 고려하여야 할 것은 죄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 가운데 태어난다. 이 죄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준다. 지, 정, 의 모든 부분에 오염을 주었다. 인간의 도덕적인 의식 (moral consciousness)에도 영향을 주었다. 죄가 인간의 지식을 어둡게 한 것처럼 죄는 인간의 의지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연인(natural man, 중생하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생겨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중생한 사람 마음에 내재(內在, indwelling)하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못한다. 또 자연인은 무엇이 “선”인지 조차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도덕적인 선” 은 하나님의 뜻과 부합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도 아니며 따라서 그를 기쁘시게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다”라고 히브리서 11: 6절에 말씀하였다. 완전히 타락한 인간은 자기중심이며 본질상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성경에서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찾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로마서 3:23절이나, 시편 14편에서 말한다. 시편 58편 3-5절에서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독사(毒蛇)”라고 한다. 모두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인 의식이란 유한(有限, finite) 하고 죄로 물들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윤리를 논할 때 중요한 대목이다. 그럼에도 자연인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을 표준으로 삼아 자기의 뜻에 맞게 행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다음에는 중생한 사람의 의식구조(意識構造)를 생각해 보자.

중생한 사람의 도덕적 의식 구조는 어떠한가? 지, 정. 의 가 달라진다. 고린도후 서 5:17절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고 한다. 중생한 사람의 의식 구조는 다시 한 번 전에 있던 모습으로 복구(復舊, restoration)됨을 말한다. 이것은 앞으로 공부할 접촉점(point of contact . Anknuepfungspunkt)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에게 찾아 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 졌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의 지, 정, 의(知 intellect, 情 emotion, 意 volition)가 모두 죄로 물 들어서 각기 자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적인 의식이 다시 복구되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그리스도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Anknuepfungspunkt)의 근거가 형성된다. 도덕적인 의식을 되찾는다고해도 그것은 아직도 유한하다. 그러므로 복구된 도덕적 의식마저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늘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의식 구조가 변한 사람은 원칙에 있어서 변한 것 뿐, 아직도 몸을 입고 입기 때문에 항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항상 성경 말씀의 권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 생각이 잘못될 때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넘어지는 사람을 일으키고, 약한 사람을 강건케 하고,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고 자실할 사람에게 새로운 소망을 준다. 도덕적 의식이 회복된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늘 같이 한다. (An on-going desire to please God). 이것이 증거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적 의식은 세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첫째는, 최초에 아담이 가졌던 의식 구조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해석한대로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재해석하는 도덕적 의식 구조가 있고, 둘째는,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의식 구조가 있어서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재해석하려는 구조가 있으며, 마지막 셋째는, 복구된 의식 구조 즉 중생한 도덕적 의식 구조가 있다.

그러면, 이제 천주교(Roman Catholicism)를 보도록 하자.

천주교의 도덕적 의식 구조는 어떠한가? 천주교는 기독교와 이교도(異敎徒)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천주교의 가르침은 주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의한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정통신학이 토마스의 교의학(Summa Theologica, 1267-1273)이라는 책을 통해서 천주교에 변질된 신학을 전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을 엄격히 구별하였다. 천주교는 신앙보다 이성을 우선한다. 신앙이란 천주교의 교리에 순응하면 그것이 곧 신앙이고 중생은 영세 (Baptism)를 받으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중생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 지식보다도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천주교에서는 수세중생설(受洗重生說, Baptismal Regeneration)을 주장한다. 세례(영세)는 천주교에 있어서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영세 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천주교에서는 이성(理性, reason)에 치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지식보다 인간의 이성을 의식하는 지식에 치중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윤리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난 성도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윤리를 행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어느 정도 독립해야 자기의 이성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 of man)신학이 발단 한다. 그러기에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자율(human autonomy)을 내세운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없이도 우리 이성을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해서 행하는 선은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적인 진리와는 전혀 다른 신학을 갖고 있다. 천주교의 이런 가르침을 알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가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 Grace Alone)를 외쳤던 것이다. 토마스의 생각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면 인간이 이성을 개발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그의 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무조건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토마스가 몰랐던 것은 인간의 이성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이성은 죄악되고 부패한 인성(人性)에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이성은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 바른 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성과 신앙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작용한다. 인간의 이성은 모두 죄로 오염(pollute)되어 있어서 하나님 없이는 정상적으로 활동 할 수 없다. 죄악된 이성은 한편으로만 치우치는데 인간 중심적이며 인간의 만족만을 추구한다. 한편,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이성(理性)은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이고 개인 중심이 아니며 모든 사상을 분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불 때, 천주교의 가르침은 성경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천주교는 도덕성을 강조한다. 토마스의 말을 빌리면, “타락한 인간은 낙원에 있던 아담과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을 사용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보다 이성을 잘 활용하며 보다 좋은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good works)이 구원에 도움을 주는가? 성경은 “대저 우리의 의(義)는 더러운 옷 같다”고 이사야 64:6절에 말한다. 우리의 의(義)가 구원에 공헌하는가? 갈라디아서 2:16절에는 “인간의 의로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에베소서 2:8절에서는 “구원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아주 분명히 가르쳐 준다. 성경적인 신학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인간 중심이 아니다. 정통신학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아주 명확한 선을 긋는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 두자. 자유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피조물은 조물주에 예속되어 있으며 예속되어 있는 동안에 참 자유가 있으며 인간의 이성이 바로 행사(exercise) 될 수 있다.

천주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중생하여 그 사람의 의식구조가 바뀐다고 해도 성경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성경은 요한1서 3:9절에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음이요“ 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이 거듭난다는 사실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거듭날 때 누구나 성령을 받는 것인데(고전12:3, 롬8:9) 성령이 내 맘 속에 거하면(indwelling)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울의 말,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행치 않으면 죄가 된다”는 로마서 14장의 말씀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토마스의 말이 옳다면 성도는 불신자와 차이가 없다. 하나님 없이, 믿음 없이, 이성을 통해서 선을 행하는 일은 불신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로마 천주교의 지식 철학(知識哲學, Philosophy of Epistemology)은 이성과 신앙을 구별하는 점에서 불신앙(Unbelief)과 기독교의 중간(中間)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다음은 복음주의의 지식 철학을 보도록 하자.

복음주의(Evangelicalism) 내에서도 비슷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복음주의 방면에서 책을 많이 쓰는 영국의 C.S.루이스(C.S.Lewis, 1898-1963)의 경우를 보자. 그는 “순전한 기독교인”(Mere Christianity)라는 기독교 변증학 책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인격을 넘어서’ (Beyond Personality) 라는 책도 집필했는데 이는 일반 신자들을 위한 조직신학 책이다. ‘인격을 넘어서’ (Beyond Personality)라는 책(p.27)에서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목적은 인간의 육적인 생명인 비오스(βίος)를 영적인 생명인 조에(ζωή)로 승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 이상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루이스가 말하는 대로 비오스(βίος)가 조에(ζωή)로 변화되는 과정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죄로 물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인간의 영혼이 죄로 어두워 진일을 등한히 취급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적인 변증학에서는 항상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해놓고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으나 죄로 인하여 그를 찾아 갈수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다시 말하면, 죄성으로 물든 검은 안경을 벗을 때 인간의 이성도 바로 행사 할 수 있고, 사물을 바로 판단 할 수 있으며 도덕과 윤리도 행하는 이유가 바로 선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선을 행하고 어떤 도덕을 행하는 데는 일정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기준이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면 로마천주교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요컨대, 요즘의 복음주의는 적어도 그리스도의 지식 철학, 그리스도를 아는 철학에 있어서 많이 변질되어 감이 사실이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객관적인 기준(Objective Standard)을 세워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것이 비록 윤리나 도덕에 국한 한다 해도 그런 해결책은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차이를 모호하게 하는 소치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의 기준이 된다. 성경 속에서 자신에 관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 영문과 졸업,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목회학)Th.M.(신약학)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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