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기독교의 변증학(방법론) Christian Apologetics (Problem of Method)
1. 전제론적 접근 방법 ( Presuppositional Method)
재래식의 기독교 변증학은(Gordon Clark. Christian Apologetics, Norman Geisler, Christian Apologetics) 주로 논리적인 사고방석으로 우주론적으로 (Cosmological Argument), 목적론적(Teleological Argument), 그리고 존재론적인 입증(Ontological Argument) 이였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파산당한 인간이 이성으로 스스로 이런 논리에 감화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어찌 지. 정. 의 의 능력을 동원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변증학의 접근 방법은 재래식의 이성을 통한 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람은 영적으로 파산당하여 죽은 상태이므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부터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엡2:1-8)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를 깨워주지 않으면 아무도 혼자의 힘으로서는 영적인 일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두 하나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가르친다. (롬6:23).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두었다. 로마서 5:14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그 어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고 하였는데 죄는 율법을 어긴 결과로 온 것인데 무슨 법을 어겨서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 율법은 모세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 아담부터 모세까지 무슨 법이 있었기에 사망이 임했는가? 양심의 법이 각자의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 양심의 법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어린애가 어떻게 양심의 법을 어길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아담부터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까지 살았던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양심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가 그들에게 전가되어, 즉 아담의 죄로 인하여 사망이 아담부터 모세사이의 사람들에게도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담의 마음에는 이미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 벌써 십계명을 하나님이 그의 마음 판에 새겨 둔 것이다. 하나님은 후에 아담에게 새겨 두었던 하나님의 법을 다시 확인하여 모세에게 그 법을 주시면서 영속화(perpetuate) 한 것이다. 모든 율법중에서 도덕법 즉 십계명(Decalogue)만을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돌 두 개에 기록하였다.(출32:16). 다른 율법, 즉, 의식법이나 민사법을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의 종류가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도덕법과 의식법 그리고 민사법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세 가지 법 중에서 도덕법이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도덕법이 없으면 의식법이 필요 없게 된다. 도덕법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양을 잡아 드리고 비둘기를 잡아드리고 양의 피를 뿌린다고해도 죄를 지었다는 근거를 무엇으로 아는가? 무엇으로 보아서 범죄 여부를 아는가? 도둑질하지 말라 한 이가 없으면 도둑질하는 것이 죄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죄가 죄 되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법을 어김에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도덕법은 그렇게 중요해서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두 돌비에 기록하였다. 사람이 도덕법을 어길 수 없다면 의식법이 필요 없게 된다. 속죄할 필요가 없으므로 민사법은 더욱 그러하다. 이스라엘 나라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신정국가(神政國家, theocracy)였다. 온 나라 백성이 큰 교회의 성원(成員)이었다. 나라에는 다스리는 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 있는가? 도덕법이다. 도덕법을 어기면 그 죄목으로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민사법도 도덕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에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리고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그런 마음을 주셨다. 이 규례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의 규례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민사법도, 의식법도 모두 변한다. 철폐된다. 민사법은 당분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이외에는 아무 효험이 없다. 의식법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의 그림자(prefigure)였다. 히브리서 10:1-4절에 보면, 날마다 드리는 짐승의 피가 어찌 우리를 깨끗게 할 것인가? 그것들은 참 형상이 아니고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골로새서 2:16-19절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고. 그러므로 메시야 이신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예표(豫表, prefigure)로 주어 진 것이라면 실물(real substance)이 오게 되면 그런 예표들은 쓸데없기 때문에 이제 의식법은 철폐되었다. 단지 도덕법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원하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이든지 십계명은 유효하다. 어디서나 십계명은 유효하다.(이에 대하여는 Ernest Reisinger. Law and Gospel. Phillipsburg: Presbyteiana and Reformed Publishing Co. 특히 제6장과 제7장을 참고)
인간의 마음 판에는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법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아래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법이다. 인간이 타락할 때에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가지 못하지만 그가 하나남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그 형상의 흔적은 남아 있다. 가을에 배추밭 추수가 끝난 후에도 그 밭에 무엇을 심었던 것인지 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 진리,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다.(엡4:24). 그래서 인간은 타락한 후에도 어느 정도의 선은 행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은 없다. 이런 선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며 인간이 자기중심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선인 것이다. 타락한 후의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심성(心性, disposition)이 변한 사람만이 영혼이 부활하여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변증학에서 접근방법은 온갖 인간의 이성을 동원해서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보이려고 해도 그 심령이 변하지 않으면 그런 논리는 하나의 궤변(詭辯, pretext) 으로 들릴 뿐 그 영혼을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접근방법(Approach)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바로 전제론적인 접근방법(Presuppositional Approach)인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은 역사를 주장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성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성경은 객관적인 사실이며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서 그를 효과적인 부름으로 불러 주셔서 모든 신비로운 구원의 비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God, who speaks through Christ by His Spirit in the scriptures, can bring one to the realization of His unfathomable loving kindness not to mention the mystery of magnificent salvation by way of His effectual calling and atoning death.)
불신자는 불신자의 철학이 있다. 그들의 철학이란 그들이 왕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그는 그가 왕이다. 그의 생각이나 행함을 모두 독자적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유리한 편으로 행한다. 그의 절대적인 가치는 본인이 세워둔 가치관이다. 그러나 중생한 하나님의 사람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그가 왕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왕이다.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오고 예수님에게 그 자리를 내어 드린다.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배우고 예수님을 경배한다. 이것은 불신자와 신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요즘 신자보다 사이비 신자 (quasi-believers, 似而非信者)가 더 많다 보니 참다운 중생한 성도를 식별하기 어렵다. 도덕페기론자(道德廢棄論者, Antinomian)들이 너무 많다. 이들의 주장은 이제는 구약과 신약을 구별하여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며,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한번 구원 얻으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 것이니 율법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며,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다고 믿으며,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었으니 아무리 잘못해도 징계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가르켜 “사이비 성도”라고 하기도 하고 또 성경에서는 “육적인 성도”(Carnal Christian)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만 그를 믿는 신앙고백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답게 빛과 소금의 직분을 하면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재래식 변증법과 반틸(Cornelius Van Til)의 변증학을 비교해 보았다. 전자는 인간의 이성에 비중을 많이 두고 그 이성에 호소하여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자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존재론적인 논쟁 (Ont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인 논쟁(Cosmological Argument), 그리고 목적론적인 논쟁(Teleological Argument) 등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틸의 경우, 인간의 이성은 죄로 물 들었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알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 갈수 없으므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무엇인지 먼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急先務)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에 의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적용되어 그 말씀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할 수 있고, 또 구원의 도리를 입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접촉점은 잘못된 접근방법이며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할 수도 없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도 없다고 가르친다. 성경에 입각한 접근방법, 성경에서 자신을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영의 눈이 밝아지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발람처럼(민22:31).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논리적인 방법으로 이성에 호소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인의 눈에 쓰고 있던 검은 색 안경을 벗어야 되는 일이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 영문과 졸업,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목회학)Th.M.(신약학)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