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히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수는 없다. 진리를 무시하면서 사랑의 가치를 높일 수 없고, 건전한 교리를 억압하면서 연합을 추진할 수는 없다. 관대하게 포용하는 것을 마치 우상처럼 여기면서 옳은 분별을 배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로 교회는 사탄의 ‘트로이 목마’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은 말씀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말씀을 지켜서 다음 세대에게 물려 줄 것을 명하셨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세대는 이 임무에 형편없이 실패하고 있다. 분별력에 있어서 실패함으로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와 무분별한 신앙의 경계선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교회는 교리에 대한 혼란과 혼동, 신앙의 무질서로 가득 차 있다. 대다수가 이러한 문제를 지닌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수 년간 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관대해야 한다는 그럴듯하지만 얕은 가르침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진리를 보는 관점에서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교회는 그 영향력을 잃어가게 될 것이고 상당히 세속화 될 것이며 갖가지 오류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별력을 기를 수 있을까? 교회가 이런 현상을 뒤집고 방향을 바꾸어 성경적인 관점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1. 지혜를 구하라
첫 번째 단계는 간구이다. 잠언 2:3-6 은 “지식(분별력)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 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분별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행복, 건강, 부귀, 영광, 편안함이나 자기 만족 등의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옳게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우리의 감정이 우리가 믿는 것을 결정한다면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세속적인 교회의 권위에 마음을 굴복시키고 주입된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우리의 분별력은 약화될 것이다.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무질서한 신앙으로부터 보호 받을 어떤 희망도 없다.
분별력을 구하는 마음은 겸손에서 나온다. 이것은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겸손함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러한 겸손은 자신의 감정을 불신하는 것이고, 스스로 충분하다는 교만을 경멸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 12:5).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일의 마지막 결정권자인 재판장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이러한 분별력을 향한 욕구는 바로 성경을 높이 보는 것과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태도를 요구하시는 것이다(딤후 2:15). 물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분별을 향한 열정으로 자연스럽게 타오르게 될 것이다.
2. 분별력을 위해서 기도하라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 이르시길,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고 하셨다. 솔로몬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다. 부귀 영화, 권력, 적을 이기는 승리 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분별력(지혜)를 구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성경은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10)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1-14).
솔로몬의 간구가 철저하게도 이기적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솔로몬을 칭찬한 것을 주목하라: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구하지 아니하며…” 이기적인 마음은 참 분별력과 병행될 수 없다. 분별력을 구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심리학과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상에 매도된 현대 복음주의는, 자기중심적이며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기독교 세대를 배출해 내고 말았다. 사람들은 분별에 대해 흥미조차 없다. 그들의 모든 영적 관심은 스스로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신이 느끼는 욕구를 충족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분별력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진리와 거짓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능력은 성화되는 과정 가운데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추구해야 한다. 지난 번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분별을 위한 성경적인 처방은 열정적인 기도와 간절한 욕구로부터 시작된다. 이 두 가지가 매우 기본적인 것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적 분별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세 번째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3. 진리에
순종하라
어떤 사람은 솔로몬을 가리켜 최고의 지혜를 가졌던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 말기에 형편없이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것이다(왕상 11:4-11).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왕의 마음이 그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왕상 11:4).
솔로몬 왕은 많은 이방 여인들과 바로의 딸들을 사랑했다. 이들은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등의 딸들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족속들이다: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저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솔로몬은 이 여인들을 사랑하며 가까이 했다. 칠 백의 부인과 공주, 삼 백의 첩을 두었고 이 부인들이 결국 솔로몬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그 결과로 솔로몬은 늙었을 때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 솔로몬은 결국 시돈 사람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게 되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했던 것 같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지 않았다. 그리고 솔로몬은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동편 산에 산당을 지었고,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해서도 그렇게 했다. 그는 또한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 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왕상 11:9).
그러나 솔로몬의 이러한 실패는 그의 인생 말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몰락의 씨앗은 아주 처음부터 심겨졌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열왕기상 3장은 우리에게 묵시하기를,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혼인함을 뜻함-역자 주)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왕상 3:1)라고 기록한다. 3절은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주 처음부터 그의 순종에는 결함이 있었다. 그 많은 지혜를 소유했으면 더 잘 알았어야 했지만, 그는 타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우상숭배를 허용했던 것이다(왕상 3:2). 심지어 그 자신도 일부 우상숭배 행위에 참여했다!
순종 없는 지식은 진리를 바로 알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진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는 데 실패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고 했다. 순종하는 데 실패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한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은 참된 분별력이 아니다. 바로 솔로몬의 예가 참된 분별력을 거짓이 대신할 수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이다(그 거짓은 자신을 기만하고 결국 멸망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불순종은 마침내 분별력을 전복시키게 된다. 이를 방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도(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닌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분별하는
지도자를
좇으라
분별력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이것이다. 잘 분별하는 이들을 본받는 것이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 4:14) 지도자를 따르지 말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며 오류를 분석하여 반박하고, 성경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가르치는 지도자를 찾아 따르라. 하나님의 진리를 주의 깊게 다루는 저자의 책을 읽으라.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는 설교자의 말을 들으라. 비판적이고 분석적이며 조심스럽게 사고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접하라. 역사 속에서 오류가 교회를 어떻게 공격해왔는지를 이해하는 이들에게 배우라. 교회의 파수군 역할을 하는 이들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한다. 말씀을 훌륭하게 다루고 입증하여 신뢰감을 주는 저자들이 있다. 내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 – 신학적인 문제나 논쟁이 있는 부분, 또는 내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가르침 등 – 이런 저자들의 글을 우선 찾아본다. 믿을 수 없는 원전이나 깊이 없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류를 훌륭히 찾아낼 수 있고 진리를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교회사의 거의 모든 시대마다 매우 훌륭한 분별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저술은 분별력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자료로 남아있다. 마틴 로이드 죤스와 그레샴 매이첸은 지난 세기에 진리를 위한 전쟁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던 많은 이들 중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두 사람이다. 19세기에 챨스 스펄젼, 챨스 호지 등 그외에도 수 십의 저자들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풍부한 자료를 우리에게 물려 주었다. 그 전 세기에도 죠나단 에드워즈, 죠지 휫트필드와 그 외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전 시대는 청교도의 시대였다 – 16~17세기로 분별을 위한 가장 풍부한 자료의 목록을 남겼다. 그 전에는 종교개혁자들이 용맹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거역하는 인간의 전통과 싸웠다.
종교개혁 전에도, 거의 모든 시대에도 경건하고 분별력 있는 선진들이 오류를 대적했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사수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은 죤 칼뱅보다 천 년 이상 앞서 살았지만 똑같은 신학적 논쟁을 했었고 동일한 교리를 선포했었다. 칼뱅과 종교개혁자들은 오류에 대한 반증의 틀을 잡을 때 어거스틴의 저술에 크게 의지했다. 주후 325년 어거스틴과 동시대 인물인 아타내시우스는 아리아니즘의 오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는데, 이 오류가 바로 우리 시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계속 이어가고 있는 오류이다. 그의 저술은 바로 이 오류에 대한 명확한 반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신앙의 거인들이 저술한 유물은 오늘날에도 접할 수 있다. 이 선진들로부터 분별력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진리를 대적하는 오류에 대해서 명확하게 반박했던 그들의 본을 우리가 모방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거짓 교사들의 오류를 색출하고 바른 답을 할 수 있고 비판적이며 명확하게 사고할 수 있는 도구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주셨다. 이들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이다.
참 성경적인 분별력은 삼투현상과 같은 방법으로 자라지 않는다. 신자가 성숙해감에 따라 길러지는 것이다. 지난 며칠 간 우리는 꾸준한 기도, 성결한 지혜를 추구하는 태도, 도덕적인 온전함, 그리고 신실한 성경교사와 가르침의 필요성을 포함한, 분별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이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
5. 성령을 의존하라
하나님의 영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참 분별자이다. 바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요 16:13). 고린도전서 2:11는 “하나님의 사정(생각)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거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지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2-15).
분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님께 달려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 충만을 받아 그에게 통제될 때 그는 우리를 분별하게 하신다.
6. 성경을 공부하라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참 분별은 부지런한 성경공부를 필요로 한다. 이 부분을 빼면 지금까지 언급한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참다운 분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리 분별하고자 하는 욕망이 엄청나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을 분별할 수 있게 하지 못한다. 기도만으로도 부족하다. 순종만 한다고 충분한 것도 아니다.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불가능하다. 성령님도 말씀 없이는 분별력을 주시지 않는다. 당신이 정말 분별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분별의 원칙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진리를 배운다. 그곳에서만 성숙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 분별력은 신실한 성경공부와 가르침이 있는 곳에서 풍부히 길러질 수 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떠나면서 자기가 떠난 후에 그들을 위협할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행 20:28-31). 바울은 그들에게 경계하며 조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어떻게 경고했는가? 사탄의 맹습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어떤 보호장치를 남겨 두었는가?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히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다시 디모데후서 2:15을 자세히 살펴보자: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부지런하라).” 이 디모데에게 준 명령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주목하라. 첫째, 분별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진리의 말씀과 16절에서 말하는 “망령되고 헛된 말(세상적이고 가치 없는 수다)”을 반드시 구분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만 여길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무지함을 구별하는 일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있다. 교회와 기독교 미디어에 난발한 넌센스만 보더라도 쉽게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계속 부풀어가는 기독교 서적이 끈질기게 선전하는 이상한 견해를 보라. 우리는 그러한 우둔함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해야 한다.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부지런하라(힘쓰라).” 부지런한 것은 어떤 일꾼이 자기 일에 최고의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책임감이고, 또한 최고를 얻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부지런하라)” 헬라어 문구를 문자대로 보면 하나님과 나란히 서서 같이 일하는 동역자를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인정된 일꾼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끄러울”이라는 단어는 바울의 관점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형편없는 일꾼은 자기가 한 형편없는 일의 수준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조심성 없이 함부로 대하는 주님의 종은 무한정으로 더욱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무분별하게 다룬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세상적이고 의미 없는 수다로부터 구별하지 못한다면, 즉, 거짓 교사를 색출하고 반박하는 일을 못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려면 반드시 말씀 공부를 부지런히(힘써)해야 한다. 지름길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해야만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준비될 수 있다(딤후 3:17). 바로 이것이 핵심이고 분별의 목적이다.
발체: 존 멕아더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