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부의 미래지도’라는 미래 예측서를 평소 관심이 있던 분야라 그날로 구입하여 읽었다. 최윤식은 ‘한국교회 미래지도 1.2’에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설명하며 미래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절벽 끝에 위태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필자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다가오는 미래의 영적 쓰나미를 함께 고민하고 대처함으로 잘 극복했으면 하는 것이다.
Ⅰ. 목회 현장의 실상
지난 2월 26일자 ‘신학교 지원생의 감소’라는 국민일보 기사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교회가 영적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 준다. 예배당 건축에 무리하게 낸 빚을 감당하지 못해 교회당이 이단에게 넘어가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한다. 최근에는 신학대학원대학교마저 매물로 나오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1) 주일학교 어린이의 현저한 감소
현재 한국 교회의 70-80%는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들이다. 이들 중 목회자 사례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 자립 교회가 얼마나 될까? 목회자나 사모가 일을 해야 생활이 되는 교회가 많다. 기초생활조차 버거운 이들에게는 정부의 성직자 과세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런 열악한 교회가 다음 세대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주일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각 교단 산하 교회의 60%정도가 주일학교가 없다.
인구 감소의 여파는 교회학교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저학년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하다. 미래에 교회를 책임질 다음 세대가 없음을 뜻한다. 20년 후쯤이면 한국 교회도 유럽 교회처럼 백발노인 몇이 자리하는 교회로 보편화될게 자명하다. 최윤식은 2050년 한국 기독교인 수를 현재의 반 토막인 400만 명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재 한국 교회는 별 반응이 없다. 아직은 자신들의 예배당이 그런대로 차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가? 작은 교회는 다음 세대를 세울 힘이 없어서 문제이고 큰 교회는 본질 보다는 비 본질을 즐기며 마치 앞으로의 문제는 미래 세대의 몫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2) 세상에 중독된 교회
교회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무엇보다 세속화의 영향이 크다. 유럽에서 세속화란 ‘탈기독교’를, 한국에서 세속화는 ‘세상을 닮아감’을 뜻한다. 1990대 이후 한국교회는 그 성장의 정점을 찍고 하강하면서 지독히도 세상을 가까이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세속화와 맥을 같이한다. 여기에 비성경적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면서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비윤리적, 비상식적 행동을 했다. 이제 세상은 교회를 타락과 부패의 온상처럼 여기게 되었다. 교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를 고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여전히 과거 부흥기의 신기루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영적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데도 호시절이 다시 올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와 성화, 심판과 영생의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왜곡된 신유와 축사와 기복신앙의 설교가 넘쳐나고 있다. 교회가 바른 복음을 더 거북해하는 기이한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교회가 세속 병이 참으로 깊이 들었다.
Ⅱ. 신학교의 실상
신학대학 교수 한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교수들의 착각에 대해 깊이 탄식했다. 그는 많은 교수들이 자신이 똑똑하고 실력 있으면 강의실은 언제나 학생들로 가득 찰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과연 교수가 똑똑하고 실력만 있으면 강의실이 가득 찰까? 앞서 언급한 주일학교의 감소는 미래 목회자 지원자의 감소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다. 교회의 감소는 사역자 수요 감소로 이어지고 신학생 감소는 신학교 존폐와 직결된다. 이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 착각에 빠져 있다면 시대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학생 감소와 더불어 신학교조차 매물로 나오는 위기의 시대에 진입했다.
신학교는 교회가 진리에 바로 서서 영혼 구원과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이정표 같은 중요한 기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신실한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 신학교가 그동안 그런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해 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근 학계의 모습은 지금 어떤 영적 세력이 밀려오는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교회와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지식의 향연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자에 한국교회에 이단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신학자들에게는 목회자에게 없는 ‘시대를 읽는 눈’이 하나 더 있어야 올바른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Ⅲ. 밀려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쓰나미
현재의 유럽 교회의 실상은 한국 교회가 마주할 미래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현재 유럽사회를 가장 힘들게 하는 세력은 이슬람이다. 이들이 짧은 시간에 유럽을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다문화정책에 따른 급격한 무슬림 유입’과 ‘인구 폭탄’(population bomb)을 들곤 한다.
유럽인들은 평균 1.6명을 낳는데 이 수치는 현상 유지를 위한 1.8명에 비교해도 많이 부족하다. 반면 무슬림들은 “자녀를 많이 낳아서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는 무함마드의 마지막 설교에 충실하여 평균 6-8명을 낳는다. 금세기 말 세계 인구의 50%가 무슬림이 된다는 예측을 감안하면 유럽의 무슬림 인구가 본토 인구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슬림이 그 나라 인구의 10% 이상 되면 국가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우리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에서 계속된 테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있다.
과연 무슬림 유입과 인구 폭탄만이 유럽 문제의 원인일까? 유럽사회의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이슬람이 유럽에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갈등과 불만이라는 텃밭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 갈등은 이슬람이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양분이다. 불만 세력이 많아야 개종자들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노리는 것이 이것이다. 그들은 이슬람 국가 내에서조차 폭력과 테러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나 여러 테러단체들이 자국 정부 전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양극화로 인한 유럽의 사회적 갈등은 이슬람이 수월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요소였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 역시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 수위가 높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3포, 5포, 7포, N포 세대, 여기에 최근엔 노(老)포 세대라는 신조어마저 생겼다. 이런 표현들은 사회의 갈등이 점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언젠가 그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폭탄의 기폭제가 될 세력이 바로 이슬람일 수 있다. 한국에도 이미 내외국인 포함 많게는 40만의 무슬림이 추정된다. 이들은 오일머니와 함께 고도의 전략으로 한국의 정계와 관계에 침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공을 들이고 있다.
20세기 이후 유럽 교회는 정권과 야합 침묵해 왔고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신학자들은 교회 세속화의 동조자 노릇을 했다. 이런 상황에 양 떼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결국 자신의 본능을 추구하며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방황의 상징이 동성애며 그것은 차별금지의 법제화로 굳어졌고 이제는 사회가 치유불가능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거두게 된 열매다.
최근 영국 쉐필드대학의 펠릭스 응골레(Felix Ngole)라는 학생이 동성애를 금지하는 레위기 20장 본문을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했다가 퇴학 처분을 당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왜 유럽이 그 지경까지 되었을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곧 우리가 마주할 모습일 수 있다. 주일학교의 부재, 교회의 세속화, 목회 현장과 괴리된 신학교, 사회 갈등 세력으로서의 이교 집단의 등장은 우리가 서 있는 절벽의 실상이다. 한국교회가 작은 실수로도 이내 절벽 아래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한국교회는 대안도 없고 소망도 없는가? 아니다. 과거 교회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만이 대안이요 소망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 주님이시오, 역사의 주관자는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며 모든 성도가 정통 기독교 교리로 단단히 재무장하게 될 때 교회의 세속화를 이기고 이단을 이기는 교회가 될 줄 확신한다.
필자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앞으로의 10년이라 본다. 교회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래 있어야 자리를 지켜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한 손으로 성벽을 쌓고 다른 한 손으로 병기를 들고 온전히 대처해야 한다.(느 4:17)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종말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 글쓴 이 / 박광서 목사(부천 큰사랑교회, 고신, ACTS, 백석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