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성경에서 말하는 시각 장애인은 전혀 볼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본다. 칼빈은 죄인(자연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비교해서, 안경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혀 볼 수 없는 맹인이든지, 장애가 있든지 시야(視野)를 분별할 수 없는 것은 공통이다.
첫째, 소경은 왜 인도자가 되려고 하는가? 소경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있고, 경험은 지식이다. 소경이 자기 경험을 확신하면 인도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또 자기 경험이 타인에게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소경 교사’가 되려고 할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서 자기 경험에서 코끼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경은 ‘주장하는 인도자’가 아니라, ‘듣는 인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장하는 인도자가 되면 확신에 찬 소리는 하지만 결국 코끼리를 그릴 수는 없다. 소경은 반드시 구덩이에 빠진다.
둘째, 왜 소경 인도자의 인도를 소경이 따르는가?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인도를 기대한다. 소리를 들을 때에 그 소리가 자기의 길잡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 소경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소리로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즉 소경에는 두 종류의 소경이 있다. ‘누군가를 인도하려는 소경’, ‘의존해서 따라가려는 소경’이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의존해서 따라가려고 하면 좋을 것인데, 누군가를 인도하려는 소경 때문에 문제가 있다(약 3:1). 그리고 그 소경을 따라가기 때문에 더 큰 문제다.
모든 사람은 소경이다. 소경이 소경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한 방법은 “나와 같은 소리를 하면 나와 같은 소경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에게 진리는 익숙함이다. 교회에서 빠르게 ‘아멘’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익숙함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만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소경이기 때문이다.
소경의 인도자 소리에 익숙하게 되면, 내가 소경인 것을 망각하고 자유를 얻은 것으로 착각한다. 나에게 소경이라고 말하면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느낀다. 소경된 인도자가 준 마법에 걸린 것이다.
소경인 인도자를 따르지 않는 방법은 “미래가 아닌 현재와 과거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모두가 말할 수 있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은 사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해석을 신나고 즐겁게 하는 인도자를 만나기를 바란다. 모든 소경된 인도자의 입에는 “상상하지 못한 화려한 미래의 청사진”이 펼쳐져 있다. 성경에서 그 곳을 ‘구덩이’라고 한다. 소경인 인도자는 결코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다. 혹시 실수로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마지막 날에는 실수나 우연이 결코 없다.
성경은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홍해를 기억하라고 촉구했는데 거부했고, 예수는 빵(떡)과 잔을 기념하라고 했는데, 비전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 충실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기독교이고, 과거를 끄집어내서 화려한 미래를 주장하는 것은 신비주의다.
소경이 소경인 인도자에게 열광하면 답도 없고 약도 없다.
소경이 참 인도자가 되는 것은, 자기 경험이 아닌,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참 인도자(양)’는 자기 지식이 아닌 사명(使命)을 받들어 소경(양)을 인도한다. 참 인도자는 울타리를 뚫거나 구멍으로 들어오지 않고, 양문으로 들어온다. 구멍으로 몰래 들어온 ‘소경 인도자(늑대)’의 달콤한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 익숙함을 버려야 한다(자기부정). 주의 말씀인 성경만을 배우고 사모해야 한다.
출처 :한국개혁신학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