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따르는 그룹을 ‘팬덤’이라고 하고 그들을 등에 업고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을 ‘팬덤 정치’라 합니다. 팬덤은 그들이 속한 집단이나 단체, 지지 세력이나 지도자를 견고히 하고 어떤 사안에 관해 추진력있게 처리 하는데 있어서는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양쪽이 아닌 한쪽에 치우쳐 있기에 처음부터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잘못된 사상이나 어떤 사안에 대한 잘못된 선택이나 결단이 되었을 때 그 폐해는 공동체 전체에 미칩니다. 어떤 집단의 팬덤이든 이단/사이비의 형태와 흡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 세상이건 종교집단이건 팬덤은 존재해왔습니다. 인류 역사가 흘러가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팬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팬덤 목회를 하셨을까요? 또한 바울은 또 어땠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지녀야 할 리더쉽이자 처신해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를 지지하는 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자 성인 남성만 5천 명이 모일 정도였으니 그 영향력과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공생애 기간에 팬덤에 빠진 예수님의 모습을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낙하할 것을 명합니다. 하늘의 스타가 아닌 땅의 스타가 되어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라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을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또한 오병이어 기적 후에도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으려 하지만 단호히 거절하고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인 것을 깨닫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 찬사를 등에 업고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할 수 없는데 못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팬덤이 형성된 상황에서는 더욱. 팬덤의 세력이 크면 클수록 지도자는 그 팬덤에 빠지게 되어 있고, 팬덤에 의한, 팬덤을 위한 정치나 목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이 나는 교회가 온전한 교회요 하나님이 만족하실만한 교회일진데, 예수는 생각이 안 나고 목사만 생각이 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닌 목사의 사상과 철학을 따른다면 그 교회가 과연 바른 교회일까요?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셔야 하는데, 목사가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우러러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목사가 우러러 여김을 받는다면 그 목사가 바른 목사일까요?
예수님은 팬덤 목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도 만일 팬덤 목회를 꿈꾸었다면 예루살렘 교회를 접수했거나 자신이 담임목사로 있었던 안디옥 교회에 정착하여 교회 확장에 온 정열을 쏟았을 겁니다. 바울이 가는 지역마다 그의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이들이 모였고, 설교에 감명을 받은 이들이 제자가 되기도 하고, 그런 이들과 교회를 세웠지만 결코 그곳에 안주하지 않았고 팬덤을 이루어 왕 노릇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말씀대로 사신 삶에 있었지 세운 건물, 세력(팬덤), 파워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팬덤으로 모여든 이들은 물론 모든 이들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셨습니다. 팬덤은 정치도 신앙도 멍들게 하는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팬덤 정치, 팬덤 목회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님 마음에 합당한 목회자가 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장내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