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의 특징 그 네 번째는 바로 교만이다.
바울이 “교만”을 말할 때 사용한 헬라어 단어(후페레이파노스)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모두 하나님께서 흩으시고(눅 1:51), 미워하시며(롬 1:30), 물리치시고(약 4:6), 대적하시는 대상(벧전 5:5)으로 언급되었다. “교만”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높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시 101:5,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마음을 품기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죄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죄다.
사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들이 가장 납득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건전하고 선량하게 사는 사람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는 “교만”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또한 근본적인 문제를 일으켜 얼마나 심각한 파국을 일으키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전 인류를 타락으로 몰아넣고 죄와 허물로 하나님과 단절된 채 헛된 인생으로 낭비하게 만든 아담과 하와의 처음 죄는 바로 교만이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아주 단순한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두신 위치와 순종의 자리였지만, 사람은 뱀이 유혹하는 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까지 자신을 높이고 싶었다(“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창 3:5).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그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 모든 불의가 삶에 열매 맺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악인의 말이며 교만한 얼굴로 그 말을 한다(시 10:4). 모든 사람의 본분 곧 그의 마땅한 자리와 의무가 있으니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다(전 12:13). 이에 대한 강력한 거부반응이 교만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프레임은 서양 철학의 역사를 다루며 인류가 얼마나 빠르게 하나님을 부정하며 자기 이성의 자율성을 추구해 왔는지 설명한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그 모든 생각에 하나님을 부정하며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해지는지 우리는 현실 속에서 자주 목격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 23:12; 눅 18:14). 하지만 말세에 자기를 낮추는 자를 찾기는 정말 어렵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겸손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의 왕이시다. 그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겸손히 낮추셨다. 심지어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다. 가장 위대한 그 겸손이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가져온 것이다(빌 2). 예수님은 교만한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올 복음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파하셨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묻고 따지는 사람은 결코 회개의 자리까지 내려갈 수 없다. 회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을 그 창조주와 주권자 앞에 두어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잘못된 생각을 품고 반역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회개를 거쳐 그리스도께서 겸손으로 가져온 의를 옷 입게 되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자기를 낮추는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눅 18:14).
돌 같은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다(“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 롬 2:5). 그 마음을 살처럼 부드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신다(딤후 2:25).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벧후 3:9), 교만한 자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대로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인을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특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강력한 은혜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대로 자기 열심으로 노력과 헌신으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신 겸손의 옷 그 의로운 옷으로 옷 입혀졌기 때문에 회개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리를 인식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교만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지극히 크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히 낮추신 사랑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
교만에서 돌아서는 법
하지만 교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고질병처럼 신자를 괴롭힌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면한 것처럼(롬 12:3), 신자는 수시로 옛사람의 욕구에 따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이 정하신 뜻을 넘어 자기 욕구와 의지와 생각을 주장하려 한다. 대표적으로 신자의 삶에 교만이 드러나는 경우는 원망이나 불평, 불만족 할 때이다. 왜 원망하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왜 불평하는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신 사랑을 의심하며 이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불만족 하는가? 옛 언약의 백성이 파와 양파와 마늘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기웃거린 것처럼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자기만족을 극대화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열심히 찾는다. 하나님이든 돈이든 쾌락이든 다른 어떤 우상이든 상관없이.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교만을 아름다운 덕목으로 치켜세우는 오늘날, 겸손한 자가 아니라 자신만만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을 위인처럼 떠받드는 말세에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많은 세상 사람이 주목하고 칭찬하고 따르는 이가 있을지라도 교만으로 완전히 망하게 된 세상에 구원의 소식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봐야 한다.
그분을 따르면 우리는 그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다. 그분이 품으신 마음을 우리가 품으면 우리는 가족과 교회, 세상 가운데 갈등과 전쟁을 일으키는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히 서로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낮은 자리에서 종처럼 겸손히 섬길 수 있다.
중요한 건 최종 평가가 아닌가? 주님의 날 그 마지막에 그분은 자신을 낮춘 자 곧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이다. 자기를 높인 자는 그분께서 직접 낮추실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에서 돌아서기 위해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라. 주께서 반드시 높이실 것이다.
발체: The Master's Seminary, G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