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한다
바울이 “비방”을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블라스페모스(βλάσφημος)로, 신약성경에 네 차례 정도 사용되었고, 영어 단어 blasphemy(“모독”)이 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비방과 모독의 대상은 사람(모세, 행 6:11)과 하나님(행 6:11) 모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죄인의 특징으로 “비방자”(딤전 1:13) 혹은 ‘비방’하는 행위를 들어 설명한 본문이 있다(딤후 3:2; 벧후 2:11). 마운스는 <Expository Dictionary>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능력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마운스는 또한 이 단어가 ‘악의를 가지고 남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거짓 증언하는 것, 더러운 말을 뱉는 것과 연결되어 사용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비방이 일어나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당신은 비방과 모독을 발견하기 위해 후미진 골목이나 조용한 골방을 뒤질 필요가 없다. 나름 공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과 미디어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고 악독한 비방과 모욕을 쉽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듣는 이의 유익과 개선을 위한 선한 목적을 가진 ‘판단’이 아니라 대상을 무너뜨리고 상처입히고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 ‘판단’과 ‘정죄’가 난무한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가릴 것 없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은 이러한 비방에 ‘거짓’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는지 누구도 말해줄 수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이 신뢰를 잃었다.
또 한 가지, 비방이 군중 몰이를 하는 경우를 많이 발견한다. 누군가 잘못한 일이 드러나거나 손가락질받을만한 짓을 하는 경우, 한두 사람의 고발에 이어 수많은 사람이 비방을 쏟아붓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떤 배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일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일단 가지고 있는 정보만 가지고 비방이 쏟아지는 곳에 함께 더러운 말과 모욕하는 말을 쏟아 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왜 비방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정당하고 필요한 ‘판단’까지 성경이 금지하는 것처럼 오해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분명히 명령한다(롬 12:2). 사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들 손에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딤후 2:15) “지극한 선한 것을 분별하”고(빌 1:10) 항상 진실한 판단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판단은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명령했다(“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엡 4:15). 판단이 비방으로 둔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바른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을지라도 악한 우리는 남을 세우기보다 깎아내리고 유익을 끼치기보다 해를 끼치기 위해 판단의 칼을 휘두를 수 있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판단은 첫째, 바른 기준(항상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 거짓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고 둘째, 듣는 이의 유익이라는 분명한 목적, 즉 이타적인 사랑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비방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왜 비방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이에게 영생이 있다고 말하며(요일 5:13), 영생은 곧 태초부터 있는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예수님과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하셔서 그 어떤 죄도 그 안에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 죄와 어울리실 수도 없다는 말이다(요일 1장).
그런데 비방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가 세트로 들어 있다. 거짓, 악독, 불의, 미움, 시기, 분노, 악의, 살인, 분쟁, 교만… 하나님은 이런 죄를 미워하시고 사형선고를 내리셨다(롬 1:29-32).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하면서 그분과 친밀한 사귐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명령한다(엡 4:29).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방은 당신이 벗어야 할 옷이지 입어야 할 옷이 아니다. 비방의 옷을 입고는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비방에서 돌아서는 법
그러면 어떻게 비방을 멀리할 수 있을까? 갈수록 비방이 거세지는 세대에서 돌아설 수 있을까? 날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견책하면서도 동시에 비방이라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첫째, 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공의를 부르짖어라(벧전 2:23).
예수님은 가장 불의한 십자가 위에서 욕에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다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이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비방을 입에 달고 산다면 어떤 면에서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불신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을 재판장이 제대로 다룰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당신은 율법의 “준행자”이지 “재판관”이 아니다(약 4:11-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니 그분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비방이 쏟아져 나오려 할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모든 것을 신뢰함으로 의탁하라.
둘째, 은혜받은 자로서 판단하라(약 2:12-13).
비방의 잣대는 자신에게 향할 때 무뎌지고 어그러진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당신은 어떤 재판을 받았는가?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18장). 당신은 완벽하고 정당한 판결에 따라 사망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벌을 당신에게 찾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께 찾으셨다.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만큼 당신은 비방 받을 죄책이 있었지만, 오직 하니님의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비방이 아닌 용서를 받았다. 당신이 그런 무한한 은혜를 받은 자라면 이웃을 판단할 때 은혜 없고, 자비 없고, 악의가 가득하고, 스스로는 거룩한 것처럼 비방을 쏟아낼 수 있겠는가? 은혜받은 자는 먼저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보고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사랑으로 빼준다(눅 6:42).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이웃을 바로잡되 그후에 자신을 살펴본다(갈 6:1).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 자라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은 우리 주님을 먼저 미워했고 그분께 속한 우리를 그래서 미워한다(요 15:18-19). 악한 세대에서 돌아서는 삶, 악한 세상을 거스르는 삶은 산책길처럼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니다. 순례길처럼 힘들고 수고스러운 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4). 하지만 우리는 이 길을 홀로 걸어가지 않는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신뢰하고 본향을 향해 걷는 이들이 한 몸, 한 가족으로 함께 한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다가는 이 악한 세대의 급류에 휩쓸린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믿음의 가정과 함께 굳게 서서 거슬러 오르는 삶을 힘차게 살자.
발체: The Master's Seminary, G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