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주인 교회, 그러나 유람선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노아의 홍수 때에 노아가 지은 방주에 올라,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겨우 노아의 식구 여덟 명 뿐이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오랜 기간 방주를 만드는 동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던 자들은 여전히 돌아오질 않았다(벧전3:20). 그때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는 장차 노아의 때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에도(마24:37, 눅17:26) 수많은 사람들은 배도의 길에서 돌이키질 못하고 소수의 남은자만이 구원 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소수만이 갈 수 있는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대교회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의 구조 자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넓은 길은 그저 세상들이 가는 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원래 구원의 길조차 모르고 있다. 때문에 주님께서 협착한 좁은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신자들에게 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말씀하신 대상자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마5:1, 막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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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원의 방주라고 일컬어지는 현대 교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아무나 무작정 많이 태우고 보자는 심보다. 그러고서는 목적지도 잘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어렴풋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도, 천국과는 상관없이 방주 안에서 자기들끼리 잔치하고 먹고 배부르는 일에만 열심이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 구원의 방주인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유람선이지 구원의 방주는 아닌성 싶다.
진정한 구원의 방주는 아무리 거친 파도가 넘실대며 거센 태풍이 몰아쳐도 승객들을 목적지에 안착시켜 주는 것이 방주의 사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의 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방주가 되기보다는 유람선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목적지인 천상을 바라보며 항해하기 보다는 이곳저곳 세상구경하기에 바쁘고 방주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신명나는 좌판을 벌리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목적지로 가기 보다는 자기들이 처음 떠났던 그 항구로 다시 돌아가서, 더 좋은 그리고 더 안락한 유람선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출항하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해 한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이 들어와야 유람선에 투자한 비용을 메꾸고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익이 남으면 저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지만, 문제는 저들이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들이 타고 돌아온 유람선만을 추겨 세우며 자랑하기에 바쁘다.
그러다가 자기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천국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상 세상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더 호화로운 유람선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을 태울지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교회의 비극은 아닌지 그것을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