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이트는 [회원가입]을 하신 후에 내용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회원가입 후, 하루 정도 기다리시면 정식회원으로 등록해 드리며 모든 내용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사역의 특성상, 불가피한 절차임을 이해 바랍니다. 

자세한 사항은 drcharleshong@gmail.com 으로 문의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auto
 
작성일 : 18-05-18 23:38
오용되는 성경 구절 "판단하는 것이 잘못인가?"
인쇄
 글쓴이 : 창암
조회 : 483  

판단하지 마세요, 사랑하세요.”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신중히 분별하는 것과 아가페의 사랑을 별개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교회에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또한 훈계의 본질이나 내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마태복음 7장 1절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무인도 탈출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 구절이 얼마나 자주 교회 안의 분쟁이나 대적의 방패막이로 잘못 적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한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그 어떤 것도 절대로 평가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잘못 사용되어왔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절대적인 것을 거부한다. 특히 신학적, 도덕적인 것을 이야기 할 때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처럼 단순한 해석은 죄에 대한 성경적인 대적으로부터 벗어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이들을 포함해서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독단주의나 옳고 그름의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 ‘타협’, 세계 종교와의 ‘연합’ 같은 말들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현대종교 체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것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교리들’ 이다. 이 교리들을 위해서 다른 논쟁적인 교리들은 전부 희생되어야만 한다.

최근 수세기 동안 교회가 가지는 비판이나 논쟁 그리고 대적에 관한 시각은 더 축소되어져 왔다. 또한 동시에 이 구절에 대한 잘못된 이해나 적용이 비슷한 다른 구절들과 더불어서(눅 6:37, 요 3:17) 교회에 깊이 뿌리가 내려졌고, 교회의 권징이나 심판에 대한 인식 또한 흐려졌다. 이는 결국 사람들을 권고나 징계로부터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사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죄를 대항하는 것이나 성경적으로 분별하려는 행동들은 마치 금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것이 개인의 거룩함에 관한 의문이거나 교리의 다름에 관한 논쟁임에도 – 그 행동은 마치 교만하게 도를 넘어서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연합을 깨뜨리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몇몇의 복음주의 단체를 포함한 여러 단체에서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교회나 사회의 잘못된 것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마태복음 7장 1절의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을 훼손하는 사람들로 간주해 버린다. 또는 이들을 항상 트러블메이커나 좋게 말하면 논쟁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마태복음 7장 1절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적인 결함이나 교리를 무시하거나 교회의 연합을 위해 논쟁을 아예 피하라는 이런 잘못된 주장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가 이번 시리즈에서 다룰 여러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문맥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의미를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마태복음 7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삶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설교 – 의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님의 설교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행위를 중심으로 한 자기의를 강조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체제를 신랄히 비판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의 초점은 판단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위대한 설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하는지, 끊임없이 분별하고 통찰력을 가져라. 그리고 진리와 거짓을 판단하는데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내면의 진실과 위선을 분별하고, 가식과 엉터리를, 진정한 의와 거짓 의를,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길과 그 외의 다른 모든 길들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들을 마음에 새기면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이 완전히 다른 뉘앙스로 들리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자기 의를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셨다. 새리와 바리새인의 비유에서도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마치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신자들과 같이 바리새인은 대중에게 보여지는 거룩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을 좋아했다.

“예수님은 자기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행해진 다른 사람에 대한 이기적인 판단과 무자비한 비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다른 사람을 죄로부터 거룩함으로 돌이키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원한 심판으로 정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태도나 행동이 그들 자신만의 세속적이고 스스로 만든 관습에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7장 1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 당시 최고의 위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마지막 심판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그들은 심판자가 아니라 그들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대에 서게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마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 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마7:2).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 경고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같은 종류의 위선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을 유의해야 하고 또한 다른 신자들을 위선과 자기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필요한 상황에서 성경적인 분별과 권고, 훈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예수님께서 그 다음의 말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하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 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3-5)

말씀에 비추어 교회에서 죄에 대한 대적과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분명 겸손과 순수함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겸손히 순종해야 하며, 그분의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 교만하게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우리 마음 곳곳에 비추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성경적으로 우리의 죄를 살피고 다룰 때, 우리가 비로소 다른 형제들이 그들의 죄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맥아더 목사는, 우리가 심지어 대적하는 과정에 있을 지라도 우리는 겸손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모든 종류의 대적은 교만이 아닌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인양 최종 판단을 선고하는 것처럼 우리가 심판자의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마치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는 잣대에서 면제되고, 우리가 그들에게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우리에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위선자와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교만함과 자기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적하거나 판단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큰 분열을 가져온다. 하지만 우리가 경건한 분별과 징계가 필요할 때에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교회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심지어 진실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는 신자에게도 위험한 것이 있다.

첫 번째 위험은 우리가 자기의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교회 안의 잘못된 교리나 행위 등을 반대해야 할 어떤 권리도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명령하신 죄 짓는 형제를 대적하기를 꺼려 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첫 번째 위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의 죄나 거짓교리에 대해서 대적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구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부패와 타락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교회의 무리 속에 있는 엄청난 죄의 영향을 인식하고 있던 베드로는(벧전 4:15) 강력한 어조로 죄에 대한 우리의 대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정화와 순결을 위해서 필요하면 분별력을 가지고 적절한 판단을 해야 한다.

분별력이 항상 분열을 가져오진 않는다. 우리가 신실하게 예수님께서 주신 지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서로의 죄를 대적할 때 교만이나 자기의 의가 아니라 사랑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게 될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

잭 맥아더 목사 아들, 맥아더 장군의 친척이다.  Bob Jones Universit, Azusa Pacific University. Biola University's Talbot Theological Seminary(M.Div)  LA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목사, 캘리포니아 마스터 신학교 The Master's College 총장.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7,38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289 근본주의의 쇠퇴 창암 05-30 424
328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30/18) 창암 05-30 345
3287 하나님의 음성듣기(2) 창암 05-28 375
328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9/18) 창암 05-28 375
3285 하나님의 음성듣기(1) 창암 05-27 643
328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8/18) 창암 05-27 345
3283 분별력 조리법(최종) 창암 05-25 421
328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6/18) 창암 05-25 311
3281 분별력 조리법(2) 창암 05-24 498
328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5/18) 창암 05-24 313
3279 분별력 조리법(1) 창암 05-24 546
327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4/18) 창암 05-24 545
3277 오용되는 구절: 용서받지 못할 죄는 무엇인가? 창암 05-22 471
327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3/18) 창암 05-22 570
3275 구원...간단해요? 믿기만 하세요. 창암 05-21 611
327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2/18) 창암 05-21 338
3273 하나님의 자비가 넓어졌는가? 창암 05-21 466
327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1/18) 창암 05-21 349
3271 오용되는 성경 구절 "판단하는 것이 잘못인가?" 창암 05-18 484
327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9/18) 창암 05-18 510
3269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으라. 창암 05-18 519
326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8/18) 창암 05-17 489
3267 장로의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 창암 05-16 436
326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7/18) 창암 05-16 489
3265 올바른 전도관 창암 05-16 422
3264 스펄젼과 함게하는 아침묵상(5/16/18) 창암 05-16 303
3263 목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들 창암 05-15 510
326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5/18) 창암 05-15 552
3261 이단들 창궐 이유? 창암 05-13 420
326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4/18) 창암 05-13 527
3259 성경 번역의 문제점(최종) 창암 05-11 396
325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2/18) 창암 05-11 405
3257 성경해석의 문제점 (3) 창암 05-11 391
325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1/18) 창암 05-11 490
3255 성경번역에 문제있다.(2) 창암 05-10 532
325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10/18) 창암 05-10 365
3253 성경 번역의 문제점 (1) 창암 05-09 403
325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9/18) 창암 05-09 349
3251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창암 05-08 458
325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8/18) 창암 05-08 419
3249 교회분쟁 해결에 대한 글(최종) 창암 05-06 365
3248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7/18) 창암 05-06 304
3247 교회 분쟁 해결에 대한 개인적인 글 (1) 창암 05-04 567
3246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5/18) 창암 05-04 317
3245 현대 교회와 교리 설교의 회복 창암 05-04 450
3244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4/18) 창암 05-04 486
3243 개혁주의 관점에서 가정 교회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열 다섯 가지 이유 창암 05-03 414
3242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3/18) 창암 05-02 247
3241 설교표절이 왜 잘못인가? (최종) 창암 05-02 375
3240 스펄젼과 함께하는 아침묵상(5/2/18) 창암 05-02 32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