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믿는 성도들이 오해하는 교리가 성령이다. 어떤 분은 성령을 하나의 힘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령은 힘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 바로 그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도 우리처럼 성삼위 중 제이위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는 “우리 보다 먼저나신 피조물“ 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골로새 1:15절 말씀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골로새 1:16을 보면 저들이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예수는 바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나 종교는 구원이 없다.
과연 창세기 1:26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왜 일인칭 복수인 “우리” 란 말을 썼을까 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입증한다. 또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내려가서” 라고 하였다. 역시 하나님은 자신을 일인칭 복수로 나타냈다.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결정적인 삼위일체의 교리의 입증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이 이사야 6장 말씀을 인용한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결정적인 입증은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고 했는데 아버지, 아들 성령이 삼위일체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이름으로“ 란 말이 단수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만일 삼위가 각각 다른 분이라면 복수로 되어 있을 것인데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은 삼위가 모두 한분 하나님을 의미함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대개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혼동하는 분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언급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읽어가면서 보면, 그 오순절이 자꾸만 반복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어떤 교파에서는 오순절은 지금도 반복되고 세상 끝날 까지 반복한다고 가르친다. 또 이들은 히브리 13:8 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란 구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니 오늘도 오순절에 있었던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불변하다는 말씀은 그의 속성(attributes 屬性) 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의 사역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가령 노아의 홍수가 다시 반복하는가? 가령 십자가 사건이 다시 반복하는가? 아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 (God's Redemptive History) 에서 유 일회 적인, 단회적 (單回的)인 사건들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끝난 지금은 그런 일을 다시 반복해서 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 뿐이다.
오순절 사건도 그러하다. 오순절에 약속의 영이 오셨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사도행전 1:8에 곧 성령을 보낼텐데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라고 말씀 하였다. 또 주님께서 그가 승천한 다음 성령을 보내셔서 진리를 증거 하실 것도 이미 요한복음 14장에서 미리 말씀하셔서 제자들은 그런 성령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으며 과연 오순절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오순절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했던 성령을 보내신 날이고 신약교회가 출발하여 승천한 주님의 영이 말씅을 통해서 전세계에 산재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 운동을 촉진한 날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우리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약속이란 말은 <언약> (言約, covenant)이란 의미 이다.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매‘ 란 말에서 ”계신다“는 말은 원문에서 ”천막(天幕)을 쳤다’라는 말 즉 “skenew" 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 낮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원형으로 천막을 치고 그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 중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벡성을 다스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계시고 오늘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 되신다. Immanuel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신다는 말이다.
오순절에 불의 혀, 강한 바람, 방언 등의 해석이 구구하지만 <불의 혀> 라는 말은 오늘도 그런 불의 혀가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던 때에 있었던
일시적인 단회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았다. 그때 시내 산에는 우뢰소리가 나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리고 불 가운데 연기가 일고 그런 가운데서 받은 계명을 기억 한다 (출 32장).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2에서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지금 여기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던 때와 연관 지어 생각하라. 시내산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신정국가(神政國家, theocracy) 를 만드는 장면이다.
오순절 사건은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어 신약 교회가 탄생한 기록이다. 본문에서 강한 바람이 불고 불의 혀가 갈라지고, 그리고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두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와 같은 상황이다. 그때도 구름과 바람과 불이 있었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 란 말을 했다. 그 말씀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불은 정결케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정열을 가르킨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복음을 나가서 전하라는 하나님의 멧세지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은 왕성하게 전파된다. 성령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을 받은 증거는 전도하는 것이다 (행 1:8).
방언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알지 못할 방언 (unintelligible gibberish)이 아니다. 전 세계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가 배우지 않은 말로 세상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기적 중 기적이다. 이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서로 배우지 아니한 외국어를 더듬거림 없이 자유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언은 항상 예언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것을 통역하면 예언이 되고 그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기에 통역없는 방언을 금한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선교 하는 데는 말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원전 2세기에 LXX 을 만들도록 애급왕 Ptolemy IV 를 동원해서 역사하시어 칠십인역을 만들게 하여 잊어버린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부터 당시 통용되던 헬라어로 읽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약성경이 끝난 다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약 400년 어간에 전 세계의 언어를 헬라어로 통일했다. 어디가나 헬라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바울은 소아세아를 여행하면서 헬라어로 된 LXX 으로 전도했고 사람들은 쉽게 복음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분들은 원래 신약성경은 아람어로 기록된 것을 후세 사람들이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사람이 있다. 가령 영국 Scotland 의 St. Andrews 대학의 Matthew Black 박사 같은 사람이나 미국 Chicago 대학의 종교학 교수였던 Edgar Goodspeed 교수가 그런 사람이지만 이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신약은 원래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만일 번역한 것이라면 pun 즉 말장난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가령 예를 들어서,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저 밭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나 안 깐 콩깍지냐? 라는 멋있는 말을 영어로 그런 묘미를 살려 번역할 재주가 없다. 영어에서 Peter Piper picked a peck of pickled peppers 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무리 유능한 분이 번역해도 그 멋진 두운법(頭韻法 alliteration) 의 묘미를 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런 묘미가 있는 기교를 만일 신약이 원래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번역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 필자의 반론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상시에 아람어를 일상용어로 사용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아람어를 필요에 따라 모두 사용했다. 아람어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에 아람어 몇 개가 등장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아람어만 사용했다 고 단언하는 것은 억측 (臆測) 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경이 원래 아람어로 기록된 것은 아니고 신약성경은 윈래 헬라어를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조금 전에 언급한대로 WCF 에서도 그렇게 증언학고 있고 신약성경의 구문 (構文 syntax)가 그렇게 주장한다.
성령 세례는 곧 구원을 말하며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로마인서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 니라” 라고 했으니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이룩할 때 경험하는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사건이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는데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모두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세례는 중생하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다시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 아니라 중생할 때 일생에 한번 받는 일로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처음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별도로 받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오순절파와 순복음파 들이다. 저들은 사람이 중생하는 것은 자기 본인의 힘으로 되어 지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세례가 구원을 얻은 다음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란 말은 없다. 엡 4:5에 보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라고 했다, 세례는 하나뿐이다. 그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즉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 (organic union with Christ) 할 때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성도가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mystic union with Christ)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산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의 설명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찾아 불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중생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枝)로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 우리가 그리스도완 신비적인 연합으로 접하여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의 의미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는 것과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예수를 믿게 하는 두 가지 사역이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구절에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일을 하시고 세례요한이 한 말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요” 라고 한 대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을 잊지 말자. 구약을 보면 “영을 부어 주신다” 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요엘 2:28은 베드로가 오순절 때 인용한 말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구약성경을 보면, 가령 에스겔 39:28-29 에도 “이스라엘 집에 영을 퍼부어 준다” 는 말이 있고, 이사야 32: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시고 또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의 할 것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는” 이란 말은 원문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현재분사 (現在分詞, present participle) 이다. 구원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계속적 사역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짋어 지고 간다는 말이고 그가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는 세례요한의 말도 현재형 분사 이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즉 단회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어서 그가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한다는 말이 분명하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고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잊지 말자 (요14장 끝절).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게 하려 하심이다 (엡 1:17; 갈 4:19; 고후 3:18).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갈 5:15-25).
그러므로 구약에서 예언 된 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그가 보낸 성령으로 인하여 많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 (영을 퍼부어 주리니)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령 세례는 사람이 거듭날 때, 즉 구원을 얻을 때 누구나 처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이며, 중생한 다음에 다시 경험하는 특수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회적 유일회적인 성령의 역사> 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중생할때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Th.M. (신약)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 L.A)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 (L.A ) 미국 L.A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 튤립신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