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칼빈 신학교 제18회 졸업식
본문: 디모데후서 2:15
제목: 종의 길
설교: 김명도 목사
작년 졸업식때 설교를 맡아서 15분간 설교했더니 모두 설교가 짦아서 좋다고 하는 평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내용에는 관심 없이 짦은 것만 좋아하는듯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에서 어느 목사가 와서 “지루하지 않게 하는 설교법”을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설교할 때는 웃기면 제일 잘하는 설교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풍토입니다.
반면 과거 영국에서 청교도 목사들이 말씀을 시작한 적이 있었습니다.
Cambridge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목사 세명씩 짝을 지어 시골에 나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세 사람이 모두 같은 성경 본문을 가지고 각각 다른 사람이 설교하지 않은 다른 내용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약 50분간 설교하면 몇분 쉬었다가 다시 두 번째 목사가 또 40분간 설교하고 또 얼마를 쉬었다가 다시 세 번째 목사가 약 30분간 설교합니다. 본문은 같지만 세 사람이 각각 다른 내용으로 설교합니다. 모두 합하면 두 시간 가량 되지만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졸거나 지루해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요즘의 흔한 복음성가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고 얼마안되어 순교했습니다.
종은 종의 길이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알고, 주인의 일을 할 준비가 되어야 하고 주인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우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라고 했으니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지적 준비를 말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앞에 부끄럼이 없는 신앙인격을 말합니다. 셋째로,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힘쓰라“ 고 하였으니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가지 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성경에 밝은 사람이 되자 둘째, 인격자가 되라, 셋째로 주님에게 온전히 헌신하라 이렇게 세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I. 성경에 밝은 사람이 되자
바르고 훌륭한 종이 되려면 주인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 주인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면 그 종은 얼마 못가서 해고당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의 종은 주인이신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하는데 그 마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특별 계시의 말씀으로 정확무오한 말씀입니다. 그 성경을 잘 알아야 주의 종으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년동안 혹흔 사년동안 성경을 연구해 왔습니다. 오늘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공부는 각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오늘 교계가 어지럽습니다. 기독교 역사 2000년에서 오늘처럼 말씀이 훼손된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고의적으로 경시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진리인 성경이 주관적 상대적인 말씀으로 전락하여 말씀의 바른 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에 임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략 세가지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통적인 역사적 문법적 해석방법 즉 Historico-Grammatical Interpretation"입니다. 성경 본문의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법적 해석은 성경본문의 원어의 단어, 문법, 구문등을 연구하여 그 본문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의도하는 바를 바로 깨닫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통적 개혁주의적 성경해석방법입니다.
또 History of Religions School (종교사학파) 의 해석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성경해석 방법으로 기독교는 독특한 종교가 아니라 원시 종교의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원시 종교를 연구하듯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Hermann Gunkel, Sigmund Mowinckel, 독일의 튜빙겐 대학이 그 온상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실존주의적 해석방법 (Existentialism)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의 인간의 작품으로 믿고 역사적인 문법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주관적으로 상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경해석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1960년대에 프랑스의 솔본느 대학의 석좌교수로 동성연애자인 Michel Foucault 가 Madness and Civilization (광기과 문명) 이라는 책을 써서 이른바 후기 근대주의 라는 새로운 철학 사상이 도입되면서 뉴에이지 출현하고 이것은 급기야는 신비주의적 성경해석으로 이어져서 오늘은 Contemplative Spirituality (명상영성운동)이 한창입니다. Richard Foster 는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Foster 는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란 책을 써서 기독교에 동양의 신비종교의 가르침을 도입했습니다.
명상 영성운동을 하는 사람은 Foster 만 아닙니다. 요즘 Emergent Chruch Movement 나 Alpha Course 가 모두 그런 것입니다. Emergent Church 운동은 문자그대로 “과거의 전통적 예배형태로부터 빠져나오는 예배 운동”입니다. 불과 몇 년전 Brian McLaren 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태입니다. 이들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Postmodernism 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진리가 있으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의 교리나 교파를 비판해서는 안되고 따라서 에배시에는 교리를 설교하면 사람들이 서로 분파가 생기니 서로 하나가 되기위해서는 설교할 때 교리를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봉사와 전도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교리를 모르고 무엇을 전도합니까? 종전의 예배를 뜯어고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에서 교인들 중심의 예배로 고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잘 가르치는 장로 즉 성경대로 가르치고 성경대로 사는 목사나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한 것이며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존경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합니다.
졸업생 여러분, 우리는 칼빈의 후예들입니다.
Emergent Church 나 Alpha Course는 궁극적 목적이 기독교의 신앙을 왜곡하여 세계의 종교를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Discernment Ministry 의 기관지인 “Dispatch” 의 편집장인 Brown 여사는 Alpha Course 가 열리는 곳이면 몇 년간 자비량하고 찾아다니면서 저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조사했습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처음 몇 시간동안은 정통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나중 후반에 가서는 성령을 강조하고 체험을 강조하고 신비주의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이 지금 온 세계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운동을 전개하는 분이 과거 Quaker 출신인 Richard Foster 목사로서 그는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을 써서 이런 운동을 조장하고 Renovare 영성운동을 장려합니다만 한국 목사들은 이 방면에 눈이 어두어서 그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집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교계에 큰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령 피카소 라는 화가가 그린 추상화 그림을 우리가 볼 때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Picaso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당신은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해석하면 그것이 그 의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이현령 비현령> 입니다. 요즘 성경해석도 그러합니다. 아무나 제멋대로 해석해 놓고는 저마다 저마다 자기해석이 그바른 해석이라고 고집합니다. 이것이 오늘 실존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요한복음 15:26에 말합니다, 성령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그리스도“ 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1권 14장 1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했는가 하면 복음을 잘 못 전하는 목사들이 들어갈 지옥을 분주하게 만들고 계셨다” 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잘못된 신학이 전파되고 있어도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고 있으니 에레미야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에레미야 5:30절과 31절에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라고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봅니다.
성경말씀을 바로 쪼개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헬라어를 한두 학기 해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절대 정확하고 무오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것은 목사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라고 합니다.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성경에 “hai aletheiai”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he aletheia” 즉 단수 명사입니다.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거짓말은 모든 사람이 믿는다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진리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도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진리 자체이시고 로고스 자체 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한국에 ”도올“ 이라는 사람은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지만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알 수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 즉 Redemptive History 를 가르쳐 줍니다. 기원 5세기의 Augustine 은 말하기를 “구약은 신약에 나타나 있고, 신약은 구약에 숨겨져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오늘 졸업하시는 여러분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법을 배워서 험난한 이 세대에 바른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II. 주의 종은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 앞에 부끄러운 일을 하여 하나님을 욕 되게 하고 자신도 멸망합니까? 요즘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후기 근대주의 즉 Postmodernism 의 특징은 개인주의, 주관주의, 정서주의. 상대주의를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교회 예배를 보아도 기분풀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예배 형태는 무시하고 기분 좋은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엡5:18절 말씀을 읽으면서 “시”는 “시편”을 말하고, “찬미” 는 찬송가를 말하고, “신령한 노래”는 복음성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잘 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바른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학교 강의실에서 늘 학생들과 충돌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엡 5:18이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이 편지를 쓰고 또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전도할 때 바울은 칠십인역을 사용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요 그 때 사람들이 가지고 사용하던 성경은 칠십인역 (Septuagint, LXX )입니다. <칠십인역> 에서 시편을 읽어보면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가 모두 서로 같은 의미로 서로 상호 대체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시에는 제목이 “시” 라고 썼고, 어떤 시의 머리에는 “신령한 노래” 라고 했고, 또 어떤 시는 초두에 “찬미” 라고 썼으니 이 말은 어느 시는 시 이고 어느 시는 찬송이고 어느 시는 복음성가라는 말이 아니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인도함에도 목회를 함에도, 설교를 함에도 항상 주인이신 주님의 마음에 맞도록 일해야 합니다. 내 멋대로 내 기분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는 “길” 이 있습니다. 그 길은 변개할 수 없는 진리의 길입니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항상 CORAM DEO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의 심정으로 일하십시오 골로새 3:23에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주께 하듯하고 눈가림만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칼빈 선생이 말한 것처럼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 의 심정으로 일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 바울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모두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학위를 받는다면 하나님에게 부끄런 일입니다.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에게 “세상 명예를 구하지 말라” 고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있습니까? 남에게 흠잡힐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없는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면 사나운 이리로 변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다가 떠나면서 그 교회 장로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떠난 다음에 이리 때가 들어와서 양떼를 해치지 않도록 하라” 라는 내용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피흘려 사신 양떼를 맡아 목양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인격 manhood 가 중요한데 학문이 깊어도 인격이 없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사람은 경멸의 대상입니다. 저는 오늘 까지 살아오면서 인격이 평신도만도 못한 목사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사람은 누구와 사귀는가? 어떤 책을 읽는가? 에 따라 인격이 달라집니다. 오늘 학위를 받으시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여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면서 여러분을 mentor 로 삼고저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주위에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만일 한 사람도 없다면 무엇인가 인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저의 Mentor 가 있습니다. Scotland 의 종교개혁가 Samuel Rutherford 입니다. 그분의 책 “Rex Lex” 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분처럼 살고 싶습니다. 1993년 St. Andrews 성당 바로 길 건너 <순교자의 묘역>에 잠들어 있는 그의 묘지의 비석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이 분처럼 한 평생을 주의 종으로 살아가리라 하고 다짐했습니다. 또 제 주위에는 저 처럼 살고 싶어하는 분도 여럿 생겨나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와 사귀는가? 누구와 교제하는가? 에 따라 인격이 달라집니다. 휼륭한 스승을 두고 그를 따르면 인격이 그렇게 변합니다.책을 많이 읽으십시오.
세월이 흘러가니 옛 스승도 갑니다. 오늘 여기 단상에 앉아계시는 여러분의 교수님들도 하나씩 둘씩 앞으로 뵙지 못할 날이 찾아옵니다.
책을 읽으세요. 책을 읽지 않고 졸업하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학위> 를 받으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합니다. 오늘 박사 학위를 받으시는 여러분은 적어도 1,000 권 가까운 책을 읽고 소화하고 부끄럽지 않은 논문을 쓰고 졸업하는 줄로 압니다. 아직 책을 못 읽었다면 졸업하고 나서 책을 읽으십시오. 칼빈은 하루 종일 Geneva Academy에서 책을 쓰고, 강의하고 설교하면서 “나는 너무 바빠서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릴 지경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책을 읽지 않고 어떻게 남을 지도합니까? 여러분이 사역하는 곳에는 여러분 보다 독서를 더 많이 하고 성경지식도 풍부한 교인들이 앉아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훌륭한 인격자가 되세요.
실력을 겸비한 인격자가 되세요.
좋은 벗을 사귀고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성훈련도 중요합니다. 기도하세요. 아침마다 성경 한 장 혹은 두 장을 원어로 읽으시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세요. 성도들, 특히 사역자에게는 기도가 생명줄입니다. 기도할 때 노스틱주의자 처럼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고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세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세요
III. 헌신의 생활
신학 지식을 갖추고 인격을 갖추고 나면 남은여생을 주님에게 온전히 바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힘쓰라" 라고 했는데 "힘쓰라” 라는 말은 원문에서 ‘spoudazo" 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열심히 봉사 하라는 말입니다. 흔히 우리는 주의 일을 뒤로 미루는 일이 많습니다. 이 "spoudazo" 라는 말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속히 오라” 라고 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오는 일에만 정성을 다하라> 는 말입니다.
오늘 영예의 학위를 받으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신 말처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광영을 안게 된 것이니 이제 남은 여생은 주님에게 온전히 바쳐져야 합니다. 헌신의 생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칼빈주의자들은 핍박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말씀을 바로 전하면 모두 싫어하는 이상한 신학기류가 교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을 편지한 것 처럼 고난을 참으며 전도인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인서르 기록하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고 로마서 8:18에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17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룬다”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칼빈 선생을 기억합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가운데 사역하였는가를 압니다.
칼빈의 임종을 지켜 본 사람은 그의 제자겸 동역자였던 Theodor Beza 였는데 숨을 거우면서 한 칼빈의 마지막 말은 “내가 한 모든 일은 아무 거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하잘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고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칼빈은 위대한 종교개혁가 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종의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걸어간 신앙의 귀감입니다. 칼빈의 후예들이여, 우리도 그를 본 받아 주의 이에 이 생명 다하도록 헌신합시다.
고통이와도, 핍박이 와도, 죽음이 와도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를 영원한 지옥에서 구해 주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 날에 내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요 나에게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라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신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던 때가 지난 날로 족합니다. 이제 후로는 우리의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해서 몸버쳐 일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건강으로 감싸주시고 여러분이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싸움터로 나가는 길에 우리 대장 예수께서 항상 이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