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진리의 근원으로 설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영원히 자존하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진리의 터가 되시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진리와 인간의 지식을 설명하고자 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그저 진리와 인간 지식의 타당성을 추측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정의하고 진리의 인식방법, 그리고 진리의 정당성을 어떻게 얻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시대를 거쳐 오면서 철학자들은 진리의 인식방법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성이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라고 믿기도 하였고 또한 감각을 통한 경험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습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때론 진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하고 변화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리와 지식의 유래를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철학자들의 실패는 하나님을 인식의 기준으로 두지 않고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현대 사회가 가져온 의식구조의 전환은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분해하고 말았다. 현대 서구 사상은 진리가 무엇을 요구하며 왜 진리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의 철학자들은 진리에서 하나님을 제거했다. 오늘날 이해되는 진리는 개인 기호에 모든 기준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오늘날 진리를 부인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것이니라”(요3:19). 진리는 명확하게 죄를 비난한다. 진리를 거부하는 전쟁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왔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 확신과 의심, 신앙과 회의, 의로움과 죄악, 이둘 사이의 잔혹한 전쟁은 오늘날까지 휘몰아치고 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의식구조의 전환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과 철학 종교 및 예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성경이 이끌어 낸 사상과 도덕적 기준들은 기성세대와 함께 사장되어 가고 있다. 근대 사상은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기준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개념은 무시되었다. 근대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건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양대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학문세계의 다수의 사람들은 근대의 사망을 선언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여러 가지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한데 뭉뚱그려 놓은 것이다. 이 용어는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사상과 경향들을 총망라한다. 1980년대 이후 건축과 예술, 문학과 역사, 문화와 종교에 이르기 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어 사용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해 확실하고 고정된 가능성을 배제한다. 설사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하여도 그 진리는 객관적으로 명확히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성이란 것을 하나의 망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진리에 있어서 객관성은 사멸하였으며 주관성만 남아있다. 포스트모더니즘적 개념은 선악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앗아갔다. 어떤 것에 대한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음으로 선악에 대한 판단과 명확한 기준도 말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성이란 것을 하나의 거대담론(metanarratives)으로 치부해 버린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성을 오만하고 엘리트주의적이며 강압적인 담론으로 여긴다. 따라서 객관적인 어떠한 기준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다. 객관주의 보다는 주관주의를 좋아하며 절대불변의 개념이라는 어떠한 진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리를 인정하나 그 진리는 객관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무엇이 되고 만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가 고정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개인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상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떠한 진리를 명제적으로 진술하는 것을 꺼린다. 명제라는 것은 어떤 것을 확언하며 부인하는 논리적 진술로서 짜 맞춰진 사고이며 참 혹은 거짓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명제적 진술이 따른다. 명제적 진술을 부인하는 한 진리를 말 할 수 없다. 명제적 진술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성경은 삼단논법이나 명제와 같은 논리적 장치를 자주 활용한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들도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다. 개인의 신앙고백이 객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는 명제적 진술로만 진리의 차원을 설명할 수 없다.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어떤 명제적 진술에 대해 그저 동의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 믿음이란,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분의 인격과 의지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다. 인간의 마음과 의지와 지성이 믿음의 행위에 따르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들은 교회 안에도 침투하였다. 그들은 ‘이머징 처지(Emerging church)’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다. 이머징 처치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전달하는 수단도 바꾸고, 세상에 가져갈 메시지 자체도 바꾸라는 것이다. 이 운동한 속한 사람들은 설교가 권위적이라는 이유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머징 스타일의 교회 중에는 목회자를 없애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narrator’로 대체한 곳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러 수단들을 동원해 복음주의 운동에까지 그 영향력을 끼쳐왔다. 스탠리 그랜즈Stanley Grenz와 쟌 프랑케John Franke가 공저해 발간한 「토대주의를 넘어서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신학의 틀 형성하기-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란 책은 복음적이고 학문적인 공동체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이들은 고정되고 궁극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모든 욕망이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파괴적인 범주에 실제로 속한 것임을 확신한다. 즉 이들은 기독 신학은 계속 변화해야 하며 확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성경적 진리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랜즈와 프랑케의 주장은 우리가 아무것도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맞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우리가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드러내는 무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요일2:20-21) 진리전쟁은 교회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있어 왔다. 사도 시대에도 맹렬한 진리 전쟁이 있었다. 이러한 진리 전쟁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불확실성을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냉조주의와 진리에 대한 미심쩍은 모호함을 순화한 회의주의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복음 메시지란, 예수가 주이시며 그분이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하고 풍요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권위 있게 선포한다. 우리는 그분의 대사로서 복음 메시지를 담대히 전하라는 명령 또한 받았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위해 전쟁을 치르도록 위임받은 군인이기도하다.
존 맥아더 목사 : 5대째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나 밥존스 신학교와 퍼시픽 대학교, 탈봇 신대원에서 신학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탈봇 신대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69년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현재까지 45년이 넘도록 한 교회만을 섬기고 있다. 마스터 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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