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 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 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다.
셋째, 설교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청중을 계속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했다.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이해는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한 행위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 없이 ‘하나님의 입’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자’(使者, messenger)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듣는 회중은 곧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곳에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함과 같이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장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만남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그 곳이다. 이렇게 설교자들에 의한 하나님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베일에 싸인 채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형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의 입과 같이 설교자들의 입이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기 계시와 은혜의 징표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통(交通)의 수단으로서 말씀 선포를 사용하신다. 이 때문에 칼빈은 설교를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혹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언급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선포로 우리에게 오시며 때로는 다양하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사로서도 오신다. 또한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그 자체는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 말씀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도 설교자는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 설교자는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고도 했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비록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보이거나 그와는 반대로 대단한 존경 받는 인간으로 보이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설교 중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말씀이 선포 되는 그곳에 두시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 새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복된 왕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왕국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즉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으로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들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 ‘간결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평이(平易) 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고 했고,
셋째, 용기 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 이 같은 설교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고 삶을 변화시켰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설교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설교가 교회에서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사회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처럼 설교란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을 또 다시 영원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냐 하는 택일성의 문제를 지닌 채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엡 6:7)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던 여러 사람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당신들은 우리에게 명령할 수 없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 분 주님이 있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꺾여야만 하고 또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대항하여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을 치켜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항해서는 안 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어느 누구든지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한 칼빈의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이렇게 설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곳 어디에나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 출처 / 칼빈의 설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