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사용문제
그러면 이러한 ‘남을 위한 기도 또는 간구’에 대해 소위 ‘중보기도’(仲保祈禱)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 사용할 때의 문제점과 유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중보’라는 용어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중보’(仲保)라는 용어를 과연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2:5은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仲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仲保)란 단어의 원어는 ‘메시테스’이다.
이 단어의 뜻은 바우어 사전에 의하면 ‘의견 불일치를 제거하거나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두 편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one who mediates betw. two parties to remove a disagreement or reach a common goal)으로 풀이하고 있다. 곧 ‘중재자’(mediator), ‘조정자’(arbitrator)란 뜻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8:6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9:15과 12:24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한다.
이상의 구절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중재자 되심을 말한다. 곧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되었던 것(죄)을 치우시고 화목케 하셨다는 의미이다.(롬 5:8-11)
그러나 갈라디아서 3:19은 모세에 대해 ‘중보’(메시테스)라고 말한다. 곧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중보’란 말은 그리스도 외의 인간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예표(豫表)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보(자)’란 말을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용하면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은 ‘중보(자)’란 말을 반드시 ‘그리스도’에게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20절에서는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보’란 단어는 단지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중보’의 성격, ‘중보’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 따라서 ‘중보’란 단어 자체는 원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두 편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었음도 알 수 있다.
2. ‘중보기도’라는 용어의 문제
그렇다면 우리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좋은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롬 8:34, 히 7:25), 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만 사용되었다.(롬 8:26) 반면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할 때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에 주로 ‘… 위하여 구하다/간구하다/기도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경의 용례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위하여 간구하다, 중보하다’(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서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는 ‘위하여 구하다, 간구하다, 기도하다’(데오마이, 아이테오, 프로슈코마이 휘페르)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용례에 의하여 ‘중보기도’란 용어를 예수님과 성령의 간구에 대해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여 한다고 하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구하다, 중보기도 하다’(엔튕카노)는 동사의 명사형인 ‘엔시스’(도고, 중보기도)가 디모데전서 2:1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모데전서 2:1의 ‘엔시스’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나아가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기도의 종류 중에 나온다.
개역판 성경에는 ‘도고’(禱告)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단어의 동사형(엔튕카노 휘페르, 휘페르엔튕카노)은 로마서 8:26,34과 히브리서 7:25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처럼 성경은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중보기도’와 성도들의 ‘중보기도’를 언어적으로 구별하지는 않고 있다.
결 론
그러나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 우리가 간과(看過) 해서는 안 될 중요한 면이 있다. 그것은 ‘중보’라는 용어의 사용이 자칫 잘못하면 교리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곧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성도들의 ‘중보기도’를 분명히 구별(區別)해야 한다. 성도들의 ‘중보기도’의 효력과 권위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중보에 근거하며 오직 그로부터만 온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중보기도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공로와 효력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며, 예수님의 중보 때문에 효력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간혹 빠지게 되는 함정은 자신들의 간절한 기도 자체에 어떤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중보의 효력만을 전적으로 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에게 공로와 영광을 돌리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기도를 힘써야 하며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힘써야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상 역사를 운행하신다. 특히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이런 기도가 활성화 되도록 교회는 지도하고 장려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은 현실 사회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지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글쓴 이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