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강력한 설교자였으며 그의 설교는 영향력 있는 설교였다. 칼빈의 설교는 주일에만 영향을 미치고 평일의 삶을 흔들어 놓지 못하는 설교가 아니었다.
칼빈 설교의 이러한 능력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 글에서 칼빈의 힘 있는 설교의 배후에 종말론적 의식이 있었음을 살피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에 주목하고자 한다.칼빈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가운데 설교와 신학을 새롭게 하였다.
1. 종말 의식은 시간과 영원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칼빈은 역사 마지막에 있을 사건들에 대해서 큰 호기심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는가를 알아맞히려는 호기심은 헛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천년왕국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던 열광주의자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물론 칼빈은 몸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과 같은 사건들을 설교했으며 이러한 것들은 칼빈에게 있어서 올바른 종말론의 내용이 되었다. 칼빈은 종말을 바라보는 현재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에게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은 건강한 신학이 아니다.”라고 했다.
칼빈의 종말론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숨 쉬고 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인 은혜 가운데 인간의 역사 속에 임재 한다. 인간의 모든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세계 가운 데 임재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영원은 이미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시간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
(2) 그럼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완 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는 가운데 인생과 역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자라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모든 악은 궁극 적으로 극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승리할 것이다. 시간은 영원에 의 하여 세계는 하나님 나라에 의하여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의 나라는 아직 이 땅과 현재 가운데 완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 안에서 칼빈 종말론의 핵심을 발견한다. 칼빈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세계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고 본 동시에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져서 매일같이 성장하고 진보한다. 동시에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으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스림이 재림의 날이 되어서야 완성되리라는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주장이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종말 이해를 시간과 영원 또는 역사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이라고 부른다. 칼빈의 종말론에는 시간과 영원 곧 세계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숨 쉬고 있다.
2. 종말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시간과 영원 또는 역사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강조하는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세 가지 영역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 의식의 영향을 세 가지 문장으로 요약한다. 첫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둘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를 낳는다. 셋째,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변혁적 역사 이해를 낳는다.
(1)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종말론적 영성을 낳는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설파하면서 신앙이 내세에 대한 명상으로 일깨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현재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영성을 추천한다.
이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묵상하는 것이며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오건 간에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미래의 삶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칼빈의 강조가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종말론적 영성을 말할 때 세계를 부정하고 오직 미래만 사모하는 영성을 머리에 떠올린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인생과 역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와 무관하게 오직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내세 또는 영생이란 현재와 격리된 삶이 아니다. 미래에 이루어지는 영생의 삶은 현재 가운데 침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의하여 내가 속한 이 자리에서 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계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으며 이제 순종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는 삶을 살아간다. 칼빈에게 있어서 내세를 명상하는 삶은 이 세계를 버리는 삶이 아니라 이 세계 가운데 세상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칼빈의 종말론적 영성은 그의 성육신적 영성과 일치한다.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이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이 땅에 찾아오신 구원자의 영성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강조는 세계로부터의 도피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세계 속에서 세상의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삶에 함몰되지 않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영성은 세계 부정의 영성이 아니라 세계 긍정의 영성이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 영성이나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적 영성과 대비된다. 수도원적인 영성은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수도원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삶을 건설하려는 시도이다. 칼빈의 세계 긍정의 영성은 또한 영지주의적 영성과도 구별된다. 영지주의자에게 이 세계는 폐기되어야 하며 떠나야 할 영역에 불과하다. 칼빈에게 이 세계는 버려져야 할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하나님 영광의 무대이다. 이러한 칼빈의 세계 긍정의 영성은 도리어 우리를 책임적 윤리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