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שָׁלוֹם עֲלֵיכֶ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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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28 22:31
칼빈의 설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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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창암
조회 : 422  

(2)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를 낳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책임적 윤리 의식을 잉태한다. 책임적 윤리를 지향함에 있어서 칼빈은 세계 도피를 지향하는 금욕주의와 세계 숭배를 지향하는 무절제한 삶을 모두 거부한다.
그 반대로 칼빈은 세계에 대해서 책임적 윤리를 전개한다. 이미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있어서 칼빈으로부터 비롯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지적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책임적 역할을 다하는 삶이다. 흔히 칼빈의 윤리를 금욕주의적 윤리라고 평하지만 이는 세계 도피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 내적인 금욕주의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무책임한 도피를 일삼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해서 능동적인 참여를 하는 가운데 전개하는 절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세상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받드는 무절제한 삶을 비판한다.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질식시킨다고 보았다. 때로 칼빈은 강한 톤으로써 세상적인 삶을 경멸할 것을 요청한다. “천상의 삶을 누리도록 창조된 사람들이 전적으로 덧없는 이 세상 것들을 좇으며 휩쓸리는 것은 참으로 비천하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칼빈이 현세의 삶을 무조건 경멸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한 초월과 경멸을 말할 때 칼빈은 영지주의적 물질 경시를 의도하지 않는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의 삶을 증오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가지는 사람이다. “성도들은 삶을 증오하거나 하나님께 배은망덕하지 않으면서 세상적인 삶을 경멸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3) 종말론적 의식은 역동적인 역사의식을 낳는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변혁적 역사 이해의 추진력이 된다. 종말론적 의식 속에서 칼빈은 자신의 역사적 단계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칼빈은 모든 시간과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시각에서 고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운명은 이미 회복되었다. 역사의 목표가 이미 역사 속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의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모든 인간의 저주가 계시되었으며, 죄의 세력이 섬멸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이 회복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 세계가 새롭게 되었으며 모든 것들이 질서로 회복되었다. 이제 세계의 운명은 더 이상 같을 수가 없다. 이제 세계는 그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틀게 되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시대는 최종적 완성 직전에 놓인 시기로서 긴장이 전혀 없는 기다림의 시기가 아니다. 칼빈이 최종적 승리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칼빈은 교회가 어둠의 세력과 전쟁 가운데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역사적 영역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역동적 접근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계 가운데 이 세계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계신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말 이해나 열광주의자들의 종말 이해와 구분되며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현실 안주적 역사 이해와 열광주의자들의 극단적 역사 이해를 모두 거부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영광의 신학을 전개하는 가운데 교회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또한 열광주의자들은 교회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극단적으로 대비하는 가운데 말씀과 성령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과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재의 영역에서 믿음과 순종을 향한 결단 요청이다. 칼빈은 단지 호기심에서 종말을 논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현재의 싸움을 향한 부르심과 소명의 차원에서 종말을 논한 것이다.


결 론
살아 있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한다.
우리는 흔히 종말론을 강조한다는 명목으로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교회에서 유행했던 시한부 종말론은 현실 도피의 종말론과 설교의 모습을 제공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다수의 교회는 종말에 대해서 무관심하든지 단지 그저 개인적인 영역에만 묵시론적 관심을 보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체와 역사를 향한 종말적 현존과 성취는 무관심의 영역이다.
우리가 내세에 대한 묵상을 강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할 때 이는 현실 도피적인 신학을 전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세를 많이 묵상하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을 때 이 세계와 역사를 향한 영향력은 가장 크게 발휘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 나라를 노래할 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가장 증대될 수 있다.
내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면서 현세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도 퇴조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않고 교회의 목적을 세상을 위한 봉사에만 한정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노래할 수도 없으며 세상에 대해서 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없다.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은 개인적 차원의 종말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적 차원의 종말론을 포괄한다. 칼빈은 현재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다가오는 미래의 영광을 찬양하는 종말론을 전개한다.
설교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살아 있는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는 설교이다. 깨어 있는 교회는 설교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며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을 재현한다. 살아 있는 교회의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을 이 자리 가운데 재현하는 설교이다. 살아 있는 설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가운데 주님의 사역을 현재로 불러들여 재현한다.
깨어 있는 교회의 설교는 종말에 다시 오는 주님을 재현한다.
 
살아 있는 설교 사역을 위하여 종말론적 의식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가운데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과 미래적 차원을 동시에 강조하는 종말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의식과 설교는 우리의 신학과 설교에 좋은 자극과 도전이 된다.

(*) 글쓴 이 / 장경철 교수(서울여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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