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날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즉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가고 있는데 이 세속화를 막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할 힘이 교회에 없다 는 것이다. 나름대로 각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 보 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 하 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60,70년대는 C.C.C를 중심으로 ‘성경공부’가 유행되어 이 방식을 교회에 도입해 보았지만 교회는 회복 되지 않았다. 70,80년대는 두란노 의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찬양의 열풍과 부흥을 주제로 한 전도 집회가 유행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80,90년대에 와서는 순복음교회를 선두로 한 ‘은사운동’이 전 교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또 미국의 부흥하는 교회를 모방한 프로그램들이 한국 장로교회 안에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그도 별 성과가 없었다. 그 중에 ‘빈야드운동’은 90년대 중반에 엄청난 감동을 주면서 수많은 교회가 따랐지만 종래는 이단운동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도 미국 교회 모방운동은 그치지 않고 90년 후반부터 더욱 큰 영향을 한국 장로교회에 주고 있다. 즉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리닉교회 등 주로 상담과 내적 치유와 같은 심리학을 적용한 프로그램들이 큰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1950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세속화 되어 가고 있고 이 세속화를 막아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아직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가 이처럼 세속화 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새로운 방법만 계속 도입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몇 가지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 원인은 교회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지만 부분적이거나 특별한 주제만을 가르치는 데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 내용을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성경의 전체적 중심 주제와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바로 설 수가 없고 쉽게 이단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장로교의 유명한 신학자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은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하여 가르침으로서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이처럼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 왔다. 개혁교회는 이 방법만이 이단자들을 공격을 막고 성도의 신앙이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대한 분량의 성경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바르고 체계 있게 가르칠 수 있고 또한 성경의 전체 내용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의 전체 중에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며 또 성경 전체를 알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거나 또는 정리해서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초대 교회 사도신경(신앙고백)이다. 이같이 정확하고 바른 신앙고백 없이는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없음을 깨닫고 이후 교회 역사를 보면 신앙고백서를 계속 작성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둘째 원인은 교회가 신조와 신앙고백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는 두 번째 원인은 이것이다. 즉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전체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고백서를 오늘날 교회는 잘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역사적 개혁교회는 이처럼 신조와 신앙고백을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을 바르게 전체적으로 체계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가 중요한 두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없으며 또한 회복할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에게 ‘신조와 신앙고백’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면 “뭐 하러 머리 아프게 그 딱딱한 교리를 배우냐?”고 하면서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오늘 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단지 신비한 신앙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능력과 권능으로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신비한 신앙 체험이나 은사중심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또한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가? 아무리 성도 개개인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성경과 교리를 바르게 전체적으로 알지 못할 때는 교회의 세속화는 계속 되고 끊임없이 교회의 침투를 시도하고 있는 이단들과 맞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오늘날 ‘신앙고백서’를 왜 배워야 할 것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가? 또한 신비한 은사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1. 신앙고백서의 근거
신앙고백이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락이며, 개인과 공동체 신앙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신앙고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신앙고백자로 반드시 주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성경에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대답 즉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는 오늘날의 정리되고 기록 된 신조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와 같은 그런 형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시편처럼 당시에는 주로 하나님이 명하시고 인간이 이에 대답하는 신앙 고백적 형태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