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며 “누구든지 다른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라고 말했다(딤전 6:3-5).
첫째, 다른 교훈의 출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다.
둘째, 다른 교훈의 목적은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다른 교훈을 주장하는 자는 교만하다. 주장하는 자세를 논하기 전에 주 예수그리스도의 바른 교훈과 맞서 다른 교훈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교만한 것이다. 예수님 보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말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견해가 더 합당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누구든지 그것에 반하는 교훈을 주장한다면 당연히 경건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된다(벧후 1:3).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성경 말씀과 다른 교훈을 내세우면 온전하게 하는 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일과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다. 가령 투기, 분쟁, 비방, 악한 생각, 다툼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울이 경고한 다른 교훈을 하는 교만한 자는 교회 밖 외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경건을 방도로 삼는 거짓 교사, 거짓 그리스도인이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었다. 나아가 자칭 “교사”였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가 아닌 궤변으로 변론과 언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를 다른 교훈으로 갈라지게 하고 다투게 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도 분쟁이 일어난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이들에 대한 노골적인 비방이 일어난다. 다른 교훈을 가진 이들이 바른 교훈을 가진 이들과 맞서 싸운다. 이들은 믿지 않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가 지키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오래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지금 시대에 맞지 않아 변형하고 타협해도 상관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어떤 면에서 가정과 관련된 다른 교훈이 교회 그리고 가정을 분열시키고 성경에 반하는 잘못된 교훈을 세상에 전달하는지 살펴보자.
1. 가정의 기본 설계를 무너뜨리는 동성애
태초에 하나님이 가정을 설계하실 때, 하나님은 남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의 “돕는 배필”로 여자를 창조하셨다. 여자는 “배필”(‘반대의’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로 남자의 성품, 관계 그리고 성적인 반대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물론 같은 원리로 남자 역시 여자의 “배필”이 된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을 이룬다(창 2).
성경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죄 없던 에덴동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은 계속해서 일반적인 원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 땅에 드러내며 번성하는 일을 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친히 주실 때,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여겨 사형으로 엄히 처벌하게 하셨다(레 18:22-30; 20:13).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와 여자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가정 계획을 지지하셨고(마19: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동을 받아 “남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라고 엄중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기독교 내부에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사와 목사들이 있다. 동성애자에게 친절하고 온유하게 대하는가 아닌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 자체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변론과 언쟁을통해(가령 성경의 무오성 거부, 바울이 쓴 내용은 시대착오라고 해석, 본문의 동성애는 모든 동성애가 아니라고주장 등)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다른 교훈을 주장한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의 기본 설계를 벗어나 경건하지 않은(가증한) 가정을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교회는 다른 교훈을 말하는 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들이 내부에서 일으킨 전쟁에 맞서 바른 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경건에 관한 교훈을 신실하게 외쳐야 한다. 성령께서 교회에 세우신 은사, 즉 교사와 목사는 바른 성경의 가르침으로 무장되어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정을 지키는 기둥과 터로 교회가 굳건히 세워질 수 있도록헌신해야 한다. 교회의 지체로서 각 가정의 부모인 그리스도인은 자녀에게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가정의 기본설계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진리로 교육해야 한다.
참으로 충격적이게도 어떤 부모와 교사, 목사는 성도가(혹은 자녀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를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으니 알아서 결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진리를 수용하도록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 어디서나 자녀를 바른 교훈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신약 성경은 아비들에게 “자녀를…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한다(엡 6:4). 그것이 바른 교훈을 가진 교회와 가정의 책임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교훈을 말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영혼을 바른 교훈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가정의 역할을 무너뜨리는 페미니즘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실 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분명히 세우셨다.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지어줬다(창 2:23). 남편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어 그의 가정을 이끈다(창 2:24).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지음 받았다(고전11:9). 그래서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한다(고전 11:3).
또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엡 5:22-33).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한다. 여기서도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분명히 두드러지며,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어 범사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남편의 머리 됨 즉 권위는 희생적인 권위다. 권위는 항상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된다. 이기적으로 자기를 내세우고 군림하기 위해 사용되는 권위는 이미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 위배된다. 반대로 권위가 없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다. 헌신적인 사랑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는 권위가 이상적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자와 감독은 주께서 맡기신 양들을희생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주께서 위임하신 영적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 사랑 없이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부작용을 낳는다. 반대로 사랑을 온전히 베푸는 데 권위가 없으면 장애가 생긴다.
페미니즘은 기독교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무너뜨리려 한다. 남편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한데, 페미니즘은 그 권위 자체를 부정한다. 아내에게 각각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아름답게 드러내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페미니즘은 아내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건 오래된 가부장적 사회가 만든(성경도 그 사회의 산물) 잘못된 사상이라고 비방한다.
그들에게 창조의 질서나 신약 성경의 가르침, 가정이 그려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은 큰 의미가 없다. 얼마든지 여러 가지 변론과 언쟁으로 성경의 논점을 피해 다른 교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가정이 경건하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이해하고 이행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남편은 리더십을 자진하여 아내에게 반납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는 하와에게 내려진 저주에 따라 “남편을 지배하려” 한다(창 3:16). 가정 안에서 머리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다. 경건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이며 따르는 교회는 이런 다른 교훈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교회 안에 침투한 페미니즘을 고발하고 그 사상에 물든 가정이 있다면 말씀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맡긴 역할에 충성할 수 있도록 남편의 희생적인 사랑과 권위를 통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도와야 한다. 아내가 하나님이 맡긴 역할에 충성하여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으로 순종하기 원하는지 세상에 아름답게 드러내야 한다.
3. 부모의 양육을 무너뜨리는 불순종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 중 하나로(출 20:12),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권위를 인정하셨고(마 15:4), 그 영을 통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말씀하셨다(엡 6:2). 그러므로부모는 권위를 가지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엡 6:4). 하나님께서도 신자를 아들처럼 대우하셔서징계하신다(히 12:7-8).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체벌과 징계를 부모의 훈육 방식에서 제거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교사에게 회초리를 빼앗은 세상은 이제 부모에게 회초리를 빼앗으려 한다. 부모의 훈육이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이루어진 몇몇 사례를 계속 부각시켜 여론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다른 교훈을 가진 이들은 교회 안에 세상의목소리를 끌고 들어와 부모가 자녀를 올바른 방식과 동기로 훈계하도록 돕기보다는 체벌과 징계를 제거한 훈육방식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말하지만(잠 13:24), 다른 교훈은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사랑함이라 자식을 미워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형식이든 아동학대는 성경이 엄중히 금하고 있는 죄다. 하지만 부모가 절제하여 사랑으로 근실히 자녀를 징계하는 것은 결코 아동학대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다른 교훈에 따라 징계 없이 양육된 자녀가 일으키는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행위, 경건에서 먼 행위를 더 많이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른교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그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화되더라도,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는 다른 교훈과 끝까지 맞서싸워야 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다음 세대를 부지런히 주의 뜻대로 양육했던 것처럼, 오늘날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는 다음 세대가 진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태초에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가정을 무너뜨렸다. 그의 전략은 단순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의심을 불어넣어 다른 교훈을 집어넣는 것이었다(‘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오히려 너희가 더 나은 것을 얻을까 봐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
오늘날 사탄의 전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에게 잘 먹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남편과 아내, 부모의 역할을 부정하고 뒤집고 뒤틀고 왜곡한다. 정말 하나님이 그것을 의도하셨는지 끝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심지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이용하면서 완전히 다른 교훈을 만들어낸다. 사탄이 원하는 결과는 자명하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경건에 이르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뒤죽박죽 혼동을 일으키며, 세대가 바뀔 때마다 점점 더 훈육되지 않은, 진리에서 멀어진 세상을 만들어낸다.
하나님의 교회여, 우리는 진리와 기둥의 터로 이 세상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에 따라 경건에 이르기 위해 부지런히 싸우는 자들이다. 대적의 반격이 더욱더 거세지더라도 염려하지 말자. 우리 손에 쥐어진 성령의 검은 어떤 좌우에 날 선 검보다도 예리하고 활력이 있으며 살아 있다. 말씀의 검을 손에서놓지 말고 끝까지 충성스럽게 이 싸움을 싸우자.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 말씀을 따르자.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답고 은혜로운 선물인 가정과 교회를 지키는 길이다. 주께서 대장되셔서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며 곧 오셔서 이 땅에 최종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조 정의
Grace to Korea의 자문 목회자.
The Master’s Seminsry에서 M.Div와 Th.M(신약전공) 과정을 마친 후, 현재 유평교회의 담임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