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예배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어떤 것을 내놓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예배에서 떠나도록 하기도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는 새로운 얼굴, 이상한 복장, 어떤 소음들, 움직이는 모든 머리들, 살랑거리는 바깥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이 미련한 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예배석에 앉아서 찬송가 가사와 곡조를 따라 부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대체 어디로 달려가고 있단 말입니까?
머릿속에 무엇이라도 들어오면, 혹은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이라도 떠오르면,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에게서 떠나 버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는 그곳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공상과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흐트러짐’ 이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가장 교활한 속임수입니다. 겉으로는 너무나 훌륭한 예배인 것 같지만 거기에 참되고도 온전한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억하지도, 받지도 않으십니다.
스틸 목사님은 예배 실패자 속에 진행되고 있는 각종 영적 질병을 12가지로 진단합니다.
은밀한 무신론자들은 영적 질병자들입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본성, 즉 영혼과 육신이 부패했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 결과, 내적인 기능들이 외적인 감각에 작용하고 외적인 감각이 다시 예배에 요구되는 우리의 내적인 기능들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실패하는 또 다른 요소는 예배에 대한 준비 부족에 기인합니다. 신자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하고 일상적인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미지근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할 때, 사탄은 이미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은밀한 사랑이 유혹을 낳고 죄를 부추기며, 심령이 나누어져 헛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어 흐트러진 예배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이미 사탄의 조종 아래 놓여 있습니다. “사탄은 모든 회중석과 팔걸이에 불덩어리를 던지며 가난한 영혼을 유혹해서 자신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헛된 생각들은 성령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영혼을 정처없이 표류하도록 이끕니다.
스틸 목사님은 이러한 흐트러짐은 예배로부터 신자를 멀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모욕하고, 예배의 유익과 영혼의 평안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흐트러짐에 대한 치료법은 무엇일까요?
스틸 목사님은 흐트러진 예배 실패자들에 대한 7가지 처방전을 제시해 줍니다.
먼저 흐트러진 예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철저하게 제거해야할 것입니다. 뿌리를 자르지 않고서는 새순이 돋아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실패한 삶에 대하여 애통해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또한 도덕적인 죄악으로 인한 애통함과 의지적인 마음의 슬픔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죄에 대한 슬픔으로 녹아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권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령 안에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될 때,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유능한 신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회중이 예배할 때 그곳에 거하시며 세계를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신자는 기도할 때와 설교를 들을 때, 묵상할 때,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자신의 오감을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적 본성에 의존하는 오감은 사탄의 이끌림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날마다 성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쳐 불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흐트러짐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책은 주님의 은혜의 힘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이 멀어지고 믿음의 눈이 밝아지며 양심의 법이 작동되어 모든 죄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신자할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많은 예배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예배의 가치와 소중함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예배! 참여함에 의미를 두는 예배! 예배 보러 가는 자세’로 일관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의 성장세는 둔화되고 퇴조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청교도 운동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진정한 예배의 회복!’ 즉, 성령님과의 교감어린 역동적인 예배의 구현에 있었습니다.
신자의 영적인 권능과 능력, 영성과 경건의 회복은 오직 예배의 성공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예배란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유일한 젖줄기인 것입니다.
리차드 스틸을 비롯한 모든 청교도들은 이 예배의 가치와 소중함과 능력을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고위관직이었던 캔터베리, 요크 대주교직을 위시하여 각종 주요관직을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고문과 능욕을 받고 추방되고 화형대에 올라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리차드 스틸
Richard Steele, 1629-1692
스틸은 영국 체셔 지방 출신의 청교도 목사이자 작가로서, 청교도 박해와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지는 17세기 영국의 격동의 시기에 런던 등지에서 설교자이자 학자로 쓰임 받았습니다. 캠브리지 세인트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을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석사학위(M.A)를 받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부지런하게 연구하고 그것을 강단에서 설교하였으며, 꾸준한 저술 활동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신자의 실제적인 삶을 심도 있게 다룬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경건한 상인』(The Religious Tradesman)은 오늘날의 경제윤리에도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1692년 11월 16일 “하나님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다. 만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하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유언을 끝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