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교회 강단 이대로 좋은가?
물난리 속에 마실 물 없다는 말이 있다. 매주일과 새벽마다 전국 5만여개 교회 강단에서 그리고 기독교티브이와 방송매체에서 엄청난 양의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 이쯤이면 말씀의 홍수라고 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왕래해보지만 얻을 수 없는 영적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암8:11~)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개선되겠다는 기대감 상승보다는 좌절감이 더 증폭된다는 전망이고 보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설교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1) 목사들은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사용하여 종교사업에 열중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성례전과 같은 예식을 준행하라고 세워진 자들도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고전 1:17) 하려고 부름을 받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종교적 행사에 능통한 전문 경영인이 될지언정 생명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전파하는 것이 주님의 진리이기보다는 종교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해 갈 수 있는 일들만 만들어낸다. 종교사업가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마치 그것이 주님의 교회를 흥왕케 하는 최선의 길인 줄 알고 말이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지키실 것이다. 주의 종들은 주님의 말씀의 뜻을 풀어 밝히 증거하는 사명자이다. 설교는 우리의 대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일을 위하여 목사가 부여받은 가장 우선되어져야 할 임무이다. 동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설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 잣대는 개개인의 양심이나 세상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천지가 변해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인지를 다 습득하게 된다.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를 목자(ποιμήν-shepherd)와 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치는 일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요 21:15-17).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지 못하면 결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선한 사업에 힘쓰지 않아서가 아니다. 훌륭한 신자들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명 줄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 희박하기에 삶을 변화시킬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장사라도 굶으면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성도들이 생명의 꼴을 골고루 잘 섭취할 때 각자의 처소에서 어둠을 몰아낼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매 주일마다 교회는 사람들로 메워진다. 물론 대형교회들이 그러할 뿐이지만. 그러나 예배당을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순간 성령의 능력은 자취를 감춘다. 금방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다. 밝은 미소조차도 찾기 힘들고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삐 돌아선다. 2)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물론 예배자 자신들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조금 전에 들은 것이 영혼을 소생케 하는 생명의 양식이었는지가 의심스럽다. 혹 그들은 단지 종교적 전문가들의 유희에 의해서 변색 퇴조된 음성을 듣고 나오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가 머물기엔 적합하지 못한 자리였던 것이다.
설교자도 양들도 어쩌면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설교자나 예배자들이 단지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을 뿐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쐬고 오겠다는 그 이상(異像)을 기대하지도 않게 만든 설교자들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 목사들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서 그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할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전파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주님의 일을 태만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저주를 받게 하는 것이다(렘 48:10). 지금 한국교회가 그 건물과 숫자의 위용만 자랑할 뿐 영적인 힘을 잃고 있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소리만 난무하다.
물론 청중들의 자세도 문제이다.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니까 이젠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적한 것이 성취되고 있는 시대에 잘 맞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자신의 양심을 찔리게 하고 심장을 도려내는 예리한 말씀의 위력을 경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적당하게 위로받고 세상과 타협하며 부와 영화를 꿈꾸어도 그것이 능력이 많고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칭송을 받게 하는 것을 즐기고자 한다.
설교자들이 처음에 하나님 편에 많이 머물러 있다가 점점 사람들 편으로 기울어지더니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 편에 서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는 중재자(사제)역할에 충실해지고 있다. 더 이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하수인 노릇하는 것으로 흐뭇해한다. 실제로 그것은 진리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당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게 먹고 살만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에서 교회 개혁을 너도나도 외친다. 작년에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요란하게 떠들었던 것은 부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너도나도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부흥이었는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는가? 주님의 훼손된 진리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주님의 심장으로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굶주림 때문이었는가? 그런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운동을 주도한 대다수는 지금보다 더 많은 부와 영화를 누리기 위한 부흥을 꿈꾼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비대하다. 그러나 더 누리고자 하는, 그야말로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구해도 얻지 못한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약 4:3) 것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서창원 목사:
-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Eqi. B.A)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과정 수료
- 에든버러 신학교(구 프리처치 성경대학) 졸업(Dip. Th)
-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대학원(New College, M. Th)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Ph.D.)
-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원장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2014-현재)
- 성북교회 담임목사
-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