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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Shalom aleikhem !

שָׁלוֹם עֲלֵיכֶ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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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2-28 18:43
설교자라면 어디를 찔러도 말씀의 피가 줄줄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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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창암
조회 : 74  

한국교회는 부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도 철저하게 세속화의 때를 벗어버리는 개혁이다. 대형교회가 없었어도 한국교회 초창기는 변혁의 힘이 있었다. 지금은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십대 교회 중 절반이 수도 서울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저변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미미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하려는 세속적 욕망에 덧 씌어져, 믿음에서 떠나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정욕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믿음을 외치지만 권력과 부와 명예를 믿음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들이 한국교회 강단을 휘어잡고 있지는 않는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고백하는 개혁교회 목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은혜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더욱 갈망한다. 그래서 파렴치하게도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한다. 오늘날 일부 목사들과 성도들은 만 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히 여기려고 설친다.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의 열 왕들이 다 모여도 그의 권세를 따라갈 수 없는 천지의 주재자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도 우리는 그 앞에서 불알친구처럼 행동할 수 없다. 그는 지존자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설교자들이 어명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치는 일은 대역죄에 해당된다. 성경 말씀을 말씀으로 바르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단의 개혁이야말로 제2, 제3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개혁교회 설교와 목회의 모토이다. 기독교는 사람들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하는 것이 한국교회 개혁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도나도 그렇게 말은 하는데 실지로 그렇게 말하는 자들 중 상당수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이며, 또 하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고 완전하며 충분한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의 무오성은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성경의 충분성은 의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무 두려움이 없이 ‘목회는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닌 자들만이 그런 말을 한다. 물론 이것도 입으로는 부정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강단에서 인용하고 즐겨 사용하는 말들을 분석해 보라.

얼마나 많은 심리학적이고 경영학적이고 철학적인 용어들이 성경진리보다 능가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경우는 설교가 심리학 또는 상담학 강론인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3) 별로 우아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들을 인용하며 설교자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업인 성경엔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심지어 이성이 받아드릴 수 없는 말씀도-을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4) 설교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강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성경에 능통한 자여야 한다. 물론 위대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물론 요즘엔 신학자라고 해서 다 성경 박사는 아니지만 말이다.

 성경에 능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교회 강단에 주된 흐름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첫째는 주제설교이다.

주제 설교는 시사적이다. 설교자가 한 주 동안에 일어난 여러 사회적 문제들, 정치적인 것들, 신문에 보도된 주요 기사들을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또는 청중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에 맞추는 설교를 한다. 또는 자신이 독서한 책 내용을 가지고 요약하여 설교를 한다. 지극히 도덕적이고 시사적이며 교훈적인 것이 설교의 전부인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적어도 두 가지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단지 설교자의 기호에 맞추는 보조 재료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설교자의 설교는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성경본문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 그런데 상당수의 주제설교들은 성경 본문에서 그 내용들을 근거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보조 재료가 될 뿐이다. 또 주제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전하기 쉽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설교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에게 잘 소화시킨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이러한 설교는 개혁교회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는 윤리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 것이다. 사람들의 문화적 교양과 품위를 높여주고 선도하는 교양 선생이 아니다. 문화사절단이 아니라 복음 전파자이다.

 둘째는 기복주의 설교이다.

물론 성경에도 복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가난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분명하다(마 6:33).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아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집트의 모든 보물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더 큰 보물로 간주했다(히 11:24-26). 그런데도 강단의 설교자들은 세상적 가치관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한다. 예수를 믿으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주님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복을 부어 주셨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잘 섬기기 위한 부와 영화를 생각해야하지 단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분명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며 단지 부활의 영광에만 동참하고자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잘못이 매우 크다. 설교자들도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한 기복신앙은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 메시지가 될 뿐이다. 그같은 메시지로는 믿음으로 살다간 선조들의 길을 결코 따를 수 없게 된다. 한국교회 강단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말씀 중심의 강단이어야 한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전파할지 몰라도 본문에 충실하고 성경 전체 메시지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 한 진정한 설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자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전파하는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가 아니다. 사신의 역할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 혹은 야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신 혹은 대사의 위치나 역할은 그를 파송한 분의 의중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조국과 대통령을 위해서 말하는 자이다. 그가 부여받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 경륜, 혹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설교자인 것이다. 성경 말씀이어야 한다. 누구든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 같이 하라고(벧전 4:11)하는데 하물며 전권대사야말로 마땅히 그를 파송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복 받으라는 말씀도 많이 있지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더욱 강렬한 메시지임을 기억하라. ‘세상 부귀영화 분토만도 못하다’고 노래는 하면서 실지로는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이 너무 많다고 온 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설교자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설교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하고 크시고 놀라운 분인지를 잘 드러내보여야 하는데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매력 없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더욱 더 알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의 청중들은 왜 그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강단에서 들려지는 것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들도 예수를 너무 모르고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어야 할 중심에 그리스도가 아닌 것들이 자리 잡도록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것들에 집착하는데 격려를 받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실로 교회는 하늘나라 보배로운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세상의 가치들을 더 소유하고 누리게 하는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되어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강단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시키는 교회경영전문가 집단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들의 설교는 성경말씀에 충실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데이빗 웰스가 쓴 <신학실종>에서 말한 통계자료를 보면 1980년대와 90년대의 미국교회도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설교자들은 겨우 20%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본다.5) 사실 강단의 심각한 문제는 웰스의 지적처럼 오늘날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다. 그것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급격하게 전환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진리에 충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학이 없는 설교요 설혹 신학을 말한다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시시 컬컬한 신학이 대부분이다.6)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개혁은 강단 개혁이 우선되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이 전인적인 변혁이 가능한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설교는 진리에 대한 증거였다. 성도들은 그 들은 진리를 삶에서 경험하였다.

그에 비해 오늘날 설교자들의 증거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한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한다.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 경험담이 강단과 노래의 주를 이루고 있다. 오! 설교자들이여! 성경에 전문가가 되라. 성경을 전할 수 없으면 설교자 되기를 포기하라. 성경 진리를 전파할 수 없는 사람을 강단에 세우는 것은 강단에 우상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존 낙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도리들을 철저하게 습득해야 한다.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펄젼 목사가 존 번연 목사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존 번연의 몸 어디를 찔러도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말씀의 피다.’ 생명의 떡이 강단에서부터 줄줄 흘러나와야 한다. 성경 진리가 교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끌어야 한다. 목회자의 목회철학이나 회중들의 욕구가 교회 운영지침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성경을 설교하라. 하나님을 말하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혁의 원리이다.

서창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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