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왜 하는가?
요즘 한국 교회 성도들이 교회당에 나가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의 필요한 모든 힘을 공급받기 위하여 예배당에 가는가? 과거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지는 매우 단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상당수가 교인들과의 교제를 위해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인터넷이나 설교티브이 방송을 통해서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누리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 교인들 간의 만남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렸다. 대형교회일수록 이 부분은 너무나 명백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설교는 왜 하는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교회에 있어서 최고로 영광스러운 직임을 설교사역으로 여긴다. 교회의 삼대표지측면에서7) 보아도 말씀선포 사역이 그 첫째이다. 과거에는 설교 강단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말씀의 권위를 가장 높이 여겼지만 현대교회들은 강단의 축소화 내지 낮춤과 병행하여 찬양대석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는 권위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권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사가 말씀선포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목사는 윤리선생도 문화조성자도 복지사업가도 경영인도 아니다.목사는 첫째도 설교자요 둘째도 설교자요 셋째도 설교자인 것이다. 청교도 초기 설교자인 윌리암 퍼킨즈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설교사역을 감당하지 않을지라도 친절한 호의를 베풀고 이웃간의 평화를 조장하며, 다른 자선 행위에 열심이며, 선한 행실을 드러내는 일에 전념한다면, 그들의 임무를 충분히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히 기만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목사가 설교사역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설교자로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나 교회 역사에서 목사는 설교자였다. 설교를 하지 않아도 다른 일들로 얼마든지 목사라는 직임을 받음이 가능한 현대교회는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현대교회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설교시간에 도입하고 있는 영상매체들은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삼을 수 있다. 과거 중세시대 말기에 종교개혁의 횃불이 치솟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보여주는 시각적 교훈과 가르침이었다. 물론 당시 문맹률이 대다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그림이나 조각 또는 음악을 통해서 전달했다. 그 결과 유럽의 상당수 신부들도 성경 자체에 무지하였고 동시에 성도들 역시 성경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루터가 복음서를 가지고 많이 설교하게 되자 루터의 설교를 들은 일부 신부들은 ‘복음서는 루터가 쓴 성경인가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그 정도는 아니라할지라도 그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조짐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과거에 주일날은 예배당에 오는 사람들은 성경찬송가를 앞가슴에 대고 희망차게 들어왔다. 그러던 것이 자동차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젠 차안에 두고 다니더니 지금은 아예 빈손으로 예배당에 오는 이가 적잖다. 왜냐하면 화면에 띄어주는 성경 구절과 찬송가 가사들이 다 있기 때문에 굳이 따로 들고 들어와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성경 찾는 것을 잊게 된다. 찬송가 가사도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대다수 예배자들이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보고’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과거 중세시대처럼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지 않아도, 그리고 찬송가도 직접 찾아 부르지 않아도 신앙 생활하는 일에 전혀 지장이 없게 만들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성경에 무지한 목사와 성도들이 무지기수로 양산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성경에 무지한 설교자들이 많고, 성경을 모태에서부터 듣고 자랐다고 하는 아이들도 성경의 교훈에 무지한 일들이 많은데 앞으로 그 정도는 더 심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설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옛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은사 중에 설교사역이야말로 가장 무겁고 영광스러운 최고의 직임임을 설교자들이 깊이 인식해야 한다. 물론 설교는 예배의 5대 요소 중 하나이다. 다른 요소들, 찬양, 기도, 헌물 및 성례 모두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설교가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찬양과 기도와 헌금은 다 피조물인 우리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비중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더 크다. 성례가 말씀선포보다 덜 무게 있는 것은 말씀 선포 없이는 성례 거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례는 말씀 선포사역이 이루어지고 그 말씀에 따라 거행되는 예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있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설교 사역은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소명 중 최고로 높고 최고로 크고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이다...기독교회에 가장 시급한 필요는 참된 설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이며 그 선포되는 설교는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인하여 신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진리로 확정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도 데살로니가 전서 2:13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이러한 중요성을 무슨 권리로 경시할 수 있는가?
발체: 서철원 목사,
서울대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B.D.)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Universitas Libera Reformate(D.Th.)총신대학교 신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