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분설과 이분설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학자들은 이분설(Dichotomy) 을 주장하는 분들과 삼분설(Trichotomy)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평신도는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교회사를 통해서 고찰하면, 초대교회에서 주로 알렉산드리아(Alexamdria) 학파에서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알렉산드리아의 거성인 Alenxadria의 Clement나 그의 제자인 Origen(오리게누스) 등이 삼분설을 주장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학계에서는 삼분설이 유행했지만, 반대로 래틴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은 모두 이분설(Dichotomy)을 가르쳤습니다. 중세에도 마찬가지로 이분설이 정설이었고 종교개혁 때도 별 변동이 없었으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독일이나 영국 학자들 사이에서 삼분설(Trichotomy)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유명한 구약 주석가인 Franz Delitzsch도 삼분설을 주장했습니다 (G.C. Berkouwer. The Man: Image of God.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2). 특히 인간의 설질 부분을 눈여겨 보실 것.
이들은 "영," "혼", "몸" 이렇게 세 부분으로 분류하여 인간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차차 설명하겠지만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의 13개의 서신에서 항상 “영과 육”을 말합니다. 오늘에도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 교파에 한하고 대부분 이분설(Dichotomy)을 믿습니다. 그것도 영과 몸이 서로 별도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간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전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혼과 몸이 서로 평행하며 서로 별도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한 개체를 이루는 전부입니다(the entity of the whole man). 사람이 영과 육으로 서로 평행하며 인간이 이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어서 각각 서로 다르게 활동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몸과 영을 엄격히 구분하여 영을 숭상하고 육을 비하하게 되는데, 이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적(Gnosticism)인 사상입니다.
오늘 교계는 고대의 영지주의 사상이 부활하여 교회를 침식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잘못되어가는 것은 부활한 영지주의에 뉴에이지 운동이 혼합하여 Foster의 Contemplative Formation(관상기도)이나 Brian McLaren의 Emerging Church 운동(기독교를 재해석하여 기독교를 전면 변개하자는 운동)이 교계를 휩쓸고 있고, Rick Warren이나 Bruce Wilkinson, Joel Osteen Tony Jones 같은 분이 그런 맥락에서 해석됩니다. 그들의 서적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을 읽어 보시면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장 짧은 말로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흔히 우리 주위에서 보는 현상은 <육신의 죄로 인하여 고민하면서 육체를 죽인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깊은 산속에서 기도하면서 오랜 기간 금식하며 육신을 학대한다든지, 마틴 루터처럼 송곳으로 몸을 찌른다든지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처사는 아닙니다. 금식은 자기 몸을 생각하며 몸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행할 것이며 육신을 학대할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영이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몸만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사람. 즉 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행을 하건 악행을 하건 모두 전 인간(the whole man)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영혼만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구원 받은 것입니다. 죽을 때 우리 영혼은 즉시 하나님에게 올라가고 육은 땅속에 들어가지만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얼마 후 주님이 다시 오시면 그 육신이 부활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강림하는 영혼과 무덤에서 부활한 육신이 합하여 <영화로운 몸, glorified body>을 입어 영원한 신천지에 살게 됩니다(벧후 3장).
창세기 2:7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입김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Nephesh Chayyah(네페휘 하야)라는 말은 영과 육을 구별하지 않고 흙으로 몸을 지으시면서 입김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고 하므로 전 인간을 말합니다.
삼분설은 영, 혼, 신 등으로 구분하며 인간의 구원의 단계에서 우선 혼을 구원하고, 영을 구원하고, 나중에 몸을 구원한다는 구원의 서정을 따릅니다. 이들은 영은 하나님과 접촉하므로 가장 중요하고 몸은 물질과 접촉하니 가장 천하고, 이 둘을 잇는 것이 혼이라고 하는데, 지.정.의 가 혼 속에 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그 혼이 타락하여 영을 타락시켰으니 혼부터 우선 구원해야 된다고 하는 이상한 교리를 펴 나갑니다. 이들은 살전 5:24 말씀을 이용하거나 히브리 4장12절 말씀을 이용하여 증거 구절로 삼지만 이분설에서 영과 육이 두 개의 별개로 평행해서 존재하지 않고 전 인간을 이루는 것처럼, 삼분설에서도 영, 혼, 신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성경에 한 두 곳에 “영, 혼, 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인간은 세 가지 요소가 있어서 그 중에서 영이 제일 중요하고 혼이 그 다음이며, 몸은 가장 천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인간은 앞서 언급한대로 전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영이나 혼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 중 13개의 편지를 썼지만 그의 특징은 “혼”과 “영”을 같은 말로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interchangeably)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인서 등을 보면 분명히 바울은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두 단어가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는 예를 든다면 누가복음 1:46-47 에 나오는 <마리아의 송>을 읽어보면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에서 처음에 나오는 “영혼”은 원어에서 “슈케이”이고, 나중에 나오는 “마음”은 우리말 성경에는 잘못 번역하여 “마음(kardia)"로 번역했지만 원어에서는 ”kardia'가 아닌 “푸뉴마, pneuma"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혼(Psuche)"이라는 단어와 영(pneuma)이라는 단어가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어 마리아는 그의 ”전 인간“이 주를 찬송한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성경에서 많이 증명할 수 있는데, 가령 창세기기 35:18이나 왕상 17:21, 행 15:26 등을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을 어떤 곳에서는 “혼”이 떠나갔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영”이 떠나갔다 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는 삼분설이 모순임을 말하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때 “혼”이 떠나가고 어떤 사람은 “영”이 떠나가는 것입니까? 가령 마태복음 27:50 하반절에 주님이 운명하는 장면에서 마태는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기록했는데, 그 구절에서 ”영혼“은 원문에서 ”pneuma"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것은 “영 (pneuma)"이 떠나가는 것이고, 인간이 죽은 것은 ”혼“이 떠나는 것인가요? 주님 말고 인간이 죽을 때도 어떤 곳에서는 ”혼“이 떠나갔다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영“이 떠났다고 가르치는 점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상 열거한 여러 성경구절에서 죽는 것을 “영” 혹은 “혼”이 떠났다고 가르치므로 이 두 단어 즉 “영” 과 “혼”은 서로 상호 교환척으로 사용됨이 분명합니다.
문제의 살전 5:23의 “영, 혼, 몸”은 삼분설을 주장하는 증거 구절이 아니라 수사학적으로 <보조 설명해 주는 표현법>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이와 같은 보조설명법을 영어로는 <epexegesis>라고 하는데, 히브리 4:12절에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라는 말로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때에 인간의 혼과 영이 서로 분리되어 갈라지는 역할을 하거나 관절과 골수가 “쪼개져서“ 서로 갈라지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우리 전 인간(whole man)이 변한다는 것을 <보조 설명하기 위한 수사용법, 즉 epexegesis>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마태복음 22:37 에서도 “마음, 목숨, 뜻” 란 단어는 원문에서 각각 “kardia, psuche, dianoia"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dianoia 를 “뜻‘으로 번역했으나 원래 의미는 “mind" 즉 ”생각“ 입니다. <마음. 영혼, 생각> 이런 모든 것들이 서로 서로 각각 별도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전 인간 (as a whole man) 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항상 <인간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거듭 났지만 육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여 가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음을 탄식합니다. 특히 로마인서 7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 영혼은 몸을 떠나 하나님에게 갑니다(고후 5:8, 빌 1:23). 그러나 그 영혼은 독립해서 혼자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할 몸과 다시 연합하여(요 5:28-9) 영화로운 몸으로 썩지 아니할 몸으로 영원히 신천지에 살게 됩니다. 주님의 구원은 우리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영과 몸, 즉 전 인간의 구원입니다. 천당에 올라가서도 영과 육으로 전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인간의 성질에 대해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신학 체계를 만들어 가르쳐 왔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중심으로 연구하면 분명 <이분설, dichotomy>이고, 이분설 조차도 영과 육이 서로 평행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영이 어떻게 서로 조화롭게 사역하는가 하는 문제는 미스테리에 속하지만, "영 그리고 "혼"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성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여러 상경구절에서 본 것같이 성경에서는 영과 혼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을은 항상 <이분설> 즉 <영과 육>이 개념을 주장하며 성경을 기록했는데, 그 증거를 여러 성경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롬 8:10; 고전 5:5; 고전 7:34; 고후 7:1; 엡 2:3; 골 2:5 등을 보십시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서는 영혼과 몸이 같이 한 개인을 이룩해서 살지만 우리가 죽는 날 영혼은 육체 없이도 살아남아 혼자서 활동합니다. 계시록 6;9에 등장하는 많은 영혼들이 제단에서 주님에게 탄원하는 내용을 보면 그 단어가 “psuche'의 복수형(plural noun)인 “pseuchas"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과 육이 조화되어 전 인간(全人間)으로 활동하다가 죽은 다음에는 영혼이 혼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분명 계시록 6장에서 하늘 제단에서 주님에게 탄원하는 순교자들의 “영혼”은 몸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입니다. 그들의 육신은 땅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의 나팔소리에 그 몸들이 모두 부활합니다(일반부활 General Resurrection).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며, 신자는 영혼과 육신이 다시 결합하여 썩지 않고 병들지 않는 영화로운 몸(glorified body)을 이루어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BA (서울)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 Th.M. (신약)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Los Angeles) 미국 Los Angeles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 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