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밀쳐내는 찬양사역..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찔리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감정의 흥분, 황홀경, 무아지경, 기쁨 ... 등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호수가 넓어도 한 곳에만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맛있는 미끼를 쏟아 부으면 넓은 호수의 물고기들이 그곳으로만 몰려드는 것이다.
똑 같은 현상이 교회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음악 콘서트와 같은 느낌을 제공하는 찬양사역을 전개하면 그 교회들에 젊은이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하여 성공하면 부흥했다고 널리 알려진다. 지금 이 시대 속에서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찬양이다.
그러나 참 예배에 변형을 일으키는 위험성이 있는 요소들을 내포한 찬양을 많이 부르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한 흥분상태에서 신앙생활하게 된다. 지금 사탄의 전략은 교회의 문을 닫도록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바른 믿음과 건강한 기독교 경건 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
성령님 찾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열성을 내니 과연 누가 이 문제를 쉽게 분간해 내겠는가? 그러나 언제 하나님께서 음악으로 영혼이 구원받고, 삶이 변화될 수 있다고 하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도들을 노래 잘하는 사람들로 구성하셨고, 악기 하나씩 다룰 수 있는 사람들로만 제자를 삼으셨을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후 감사와 경배를 올려드리는 수단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음악을 즐기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우리 자신들이 즐겁고 흥분되는 것을 찬양사역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아들은 성경공부나 설교에서는 은혜를 못 받습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고 신앙이 성장합니다!”
10대 아들을 가진 어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찬양을 부르면서 크게 영적으로 변하고 성장하고 있다고 좋아하였다. 믿음의 본질과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알지 못하면 믿음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 119: 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가장 소중한 영혼의 양식이다. 말씀으로부터 성도의 행복과 기쁨이 나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말씀을 깨달아 알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의 길이다. 찬양이 믿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은 죄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은혜의 크심을 알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이다.
물론 찬양의 가사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찬양의 가사를 통하여 배우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양이 얼마나 될까? 찬양의 가사를 통하여 신앙과 삶을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가꾸어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말씀의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요즘의 찬양은 분위기를 달구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를 올려드리는 바른 찬양이 별로 없는것 같다. 그러므로 결국 영적인 쾌락주의가 형성되고 발산되는 쪽으로 가는 것이다. 집회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람들의 밋밋한 감정에 영적인 여흥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변질되어간다. 중독성이 강한 세상 음악에 길들여진 두되를 가진 현대인들, 특히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회에 흥미를 느끼도록 제공하는 서비스일 뿐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면했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가장 중요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함으로 인간의 맑고 건전한 이성적 사고도 중요했다. 하나님의 명료한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에 분명하게 적용하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결코 종교적인 감성이나 특별한 분위기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주변에 쉽게 빠지기 쉬운 미혹을 두었다.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일찍부터 섬겼던 바알 종교였다. 바알 종교의 예배는 느낌과 감성을 제공하였다. 바알종교의 예배에서는 사람들의 영적인 행복감, 주관적인 체험, 신과 예배자가 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바알숭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예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러한 신비한 느낌과 경험을 강하게 체험했다!”
“오늘 바알 신이 이렇게 내 몸을 터치하였다!”
“바알 신이 내 속으로 와서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정적인 흥분과 황홀경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 맑고 또렷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배우라고 하셨다. 이것이 사탄숭배와 하나님 예배의 궁극적인 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는 안목이 없다. 육신의 감각과 느낌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대부분의 죄인들의 속성이다. 찬양을 뜨겁게 부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성이 형성되면 은혜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보다는 바알종교의 예배에 더 쉽게 미혹되었다. 진리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와는 달리 짜릿하고 강렬한 영적인 느낌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들 앞에 콜라와 생수를 두고서 갈등하게 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교회를 무너뜨리기 원하는 마귀에게는 효과적인 전략중 하나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되,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느낌과 주관적인 감정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적 황홀경이 예배의 성공의 척도가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