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을 살펴보면 누구든지 우리가 이제까지 교회에서 배운 Q.T.의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관상기도는 전체가 4단계로 되어 있다.
첫째 단계는 ‘성경읽기’이다. 이 부분을 천주교에서는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묵상’이다. 이 부분을 천주교에서는 ‘메디타티오’(Meditatio)라고 한다. 이는 사고를 사용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이다. 이 부분을 천주교에서는 ‘오라티오’(Oratio)라고 한다. 이 단계는 자신이 이해하고 적용한 말씀을 기도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관상’이다. 이 부분을 천주교에서는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라고 하는데, 이는 소위 신에게 거하기, 혹은 합일(合一)을 이루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성도들이 속는 부분은 묵상, 혹은 관상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상이든 묵상이든 성경을 사용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목회자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던 궁극적인 목표가 자기 우상화에 있다는 점이다.
관상기도에서 성경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집중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가하다. 다시 말해서 불교인들이 관상을 위해 불경을 사용하는 것처럼, 혹은 이방 종교인들이 관상을 위해 촛불을 사용하는 것처럼, 관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관상을 하기 위해 집중을 위한 수단에 불가하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읽는데 있어서 정확한 교리와 본문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마음에 주관적으로(직관적으로) 와 닿는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 이렇게 관상을 하는 것이 어찌하여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관상의 목적이, 성경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과 합일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성경의 사상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사상이다. 이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에 의하여 정리된 사상으로,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영혼이 물질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일자)를 관조(관상)하면서‘정화’를 통해서 '무아의 지경'에 도달함으로 ‘합일’(合一)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불교는 이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을 뿐, 내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즉 불교는 관상생활을 통해서 이생의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잊어버려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소위 해탈이라고 한다. 해탈은 일체의 기억, 감성 작용, 추론하는 이성 작용 등을 점차로 없애면서 '단일자'와의 무의식적 일치를 이루며, 이른바 탈현실적인(ecstasis)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해탈을 하게 되면서 그들은 부처라는 ‘일자(一者)’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것을 ‘성불’(成佛)한다고 한다. 불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의 관상기도도 동일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도 끊임없이 관상을 행함으로 '성인’(聖人)이 되는데 목표한다. 성인이 되면 공덕을 나누어 줄 수 있고, 구원의 중보자적 역할까지 한다. 합일을 통해서 감히 하나님이 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거의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교황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천주교의 관상기도는 뉴에이지 운동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묵상은 관상과 어떻게 다른가?
가장 궁극적인 차이는 '합일이 아니라 연합'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연합되는 것이다. 연합은 합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합일은 신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개념이다. 즉 피조물이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단은 처음 하와를 미혹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금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사단은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미혹한다. 관상 기도는 태초의 하와에게 사용했던 사단의 달콤한 미혹이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원죄 없는 하와가 이러한 달콤한 미혹에 미혹되었다고 한다면, 원죄를 품은 인류에게 이 미혹은 무엇보다 달콤한 미혹이 될 것은 자명하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해 할 것이다.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