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교제
목회자는 참으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성도에게 지극히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줌과 함께,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는가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그 일을 성심성의껏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성도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들이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관계를 신랑과 신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신실한 목회자와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가 올바른 목회 사역 안에서 연합하는 일은, 마치 신랑이 신부와 결혼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목회자와 성도는 한 언약 아래 연합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2
에드워즈는 그 말을 하고 난 뒤, 목회자와 성도가 마치 부부처럼 서로 기쁨으로 상대방을 섬기면서 서로 돕고 유익을 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적인 자녀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존경, 순결함을 바탕으로 연합된 관계로 생각했습니다.3
참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특별하고 귀중하게 여겼던 에드워즈는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설교는 에드워즈가 모든 것을 다해 섬긴 교회를 회중과의 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됐을 때 했던 고별 설교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가 지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4
그러나 오늘날에는 에드워즈가 가졌던 이런 생각과 태도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서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깊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목회자나 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목회자의 심방마저도 불편하게 여기는 교인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타 세상 사람과 교제하는 것과 똑같이,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와 같이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현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목회자와 성도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으로 크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목회자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는 거리가 멀고 길도 험합니다. 그래도 꼭 그곳에 가야만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손에는 나침반과 지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참 막막합니다. 그때, 나침반과 지도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동행하면서, 길을 안내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는 바로 성경이라는 나침반과 지도를 가지고, 우리가 올바르고 안전한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근본 교리와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회자의 말씀 선포를 신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 설교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칼빈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설교자로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신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 가운데 칼빈과 같은 여러 경건의 선배가 남겨준 책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오늘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통용될 수 있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책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책에 쓰여있는 그 모든 진리는 바로 현재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아끼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책들은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더 잘 적용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과거에는 목사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옳다고 여기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매체나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관계로, 다른 가르침을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목회자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자기를 겸손히 낮출 줄 아셨던 분들이셨기에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옛 어르신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던 맹목적인 목회자 신뢰와 추종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목회자라고 해도, 결점이나 오류가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회자 존중이 목회자 숭배로 변질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과연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행 17:11). 그리하여 목회자의 권위 존중과 맹목적 추종 경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아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겸손한 자세로 죽을 때까지 배워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작 1, 2년의 양육을 통해 신앙의 모든 것을 체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도를 평생 건전한 목양 가운데 머물게 하시고, 그 속에서 자기의 죄성과 분투하면서 오래 참는 법을 익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를 따라 신앙의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덕목이 없어진 지 오래인 이들이 교회에는 참 많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렵고 급할 때, 자기를 낮추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어섬을 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 자기를 겸손히 의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오직 거듭난 이들만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들이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졌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힘쓰기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참된 겸손함 가운데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가 주님의 인도 하심을 잘 좇아 살도록 기도하고, 성도 역시도 목회자가 자기 사역을 올바르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 없는 성도가 있을 수 없고, 성도 없는 목회자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주님의 일을 함께 감당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드워즈의 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은 자기 직분에 신실하며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목사님을 여러분에게 보내며 맡기신 그 큰 사명에 있어서 목사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한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목사님이 서로에게 기쁨의 면류관이 될 때, 그리스도와 목사님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영광스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만나 순전하고 끝없고 결코 쇠하지 않는 기쁨으로 서로를 기뻐할 때가 올 것입니다.」5
이처럼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무척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성도 역시 그리해야 합니다.
각주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 성도들의 영혼지킴이』,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132-137.
조나단 에드워즈,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A Farewell Sermon)』,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5, pp. 46-47.
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사랑 (The Love of God: Studies in 1 John)』, 김태곤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0, pp. 243-24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양낙흥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