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 설교를 마치고 아내와 논쟁이 붙었다. 아내는 목사가 스승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나는 목사는 선생이라고 말했다. 물론 마태복음 23:8에 보면, 주님만이 유일한 선생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다 랍비(선생)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극단까지 적용하면, 기독교인들은 주님 이외에 그 어떤 사람도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아무개 선생님이 아니라 아무개 씨라고 불러야 하고,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으로부터 성경 말씀을 배워야 한다. 아주 엉뚱하고 극단적인 이해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23:8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는 맥락에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 학자들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태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야브네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바리새파와 그리스도 따르미들 사이의 갈등을 반영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므로 저 말씀을 선생의 역할을 하는 모든 일반 사람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다음 구절인 마태복음 23:9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고, 육신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부르며 홍길동 씨라고 말하는 것은 나쁜 자식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그리고 모형론적으로 생각해볼 때도 목사는 선생이 맞다. 신약학자 그레고리 빌(G. K. Beale)은 모형론을 정의하며, 인물들 사이에 ‘유추적 연관성’(analogical correspondences)이 있고, 역사성—아마도 사실성 또는 실재성을 말함—이 있으며, 예고적이고 회고적인 연결이 가능할 때, 모형론적(typological)이라고 이야기한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로서 다스리는 역할과 가르치는 역할과 예배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모형론적으로 볼 때 유일한 선생이신 주님을 따라 가르치는 교사로서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예장합동 총회의 헌법은 목사의 의의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직한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각성하게 하는 자이므로 ‘교사’라 하며(딛 1:9; 딤전 2:7; 딤후 1:11)”
나는 지금까지 사역하는 동안 많은 교회를 경험했다. 그런데 그중의 절반은 교사 주일을 지키며 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위로했지만, 절반은 전혀 하지 않았다. 교사 주일을 지키지 않았던 교회 중에 어떤 한 교회에서 사역할 때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부장 집사에게 “집사님, 어린이 주일도 지키고 어버이 주일도 지키는데, 왜 스승의 주일은 지키지 않고 목사님께는 아무것도 안 해줘요?”라고 물었더니, 그 집사는 “응, 아무개야. 목사는 선생이 아니야. 그래서 스승의 주일은 없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성도들의 이런 사고방식을 탓할 수도 있지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듯이, 목사들의 잘못일 확률이 더 높다.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신박한 지식을 알려주지도 않고, 했던 설교를 하고 또 하는데 성도들이 목사를 선생이나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또 선생으로서 가르친 대로 실천하고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면서 자기는 한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는데, 선생이나 스승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도들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목사를 교사나 스승으로 느끼게 해줄 만한 무언가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데, 목사를 교사나 스승으로 보지 않는다고 나무랄 수는 없다.
해결방안은 교회에서 목회자의 선지자적 역할이 회복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4문답은 메시아 예수께서 말씀과 영으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심으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신다고 이야기한다. 이 선지자직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사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를 통해 선지자적 교사직을 감당하신다. 그래서 목사는 종교 서비스맨으로서 사람들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넘어서 부단히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내용을 갈고 닦아야 하고(로고스), 가르칠만한 자가 되어야 하며(에토스), 가르치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파토스). 이런 목사를 주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의 선생으로 보지 않을 성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시 제목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목사는 스승일까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대문자를 쓰는 ‘그 스승’(The Teacher)은 아니다. 그러나 ‘그 스승’께서 자신의 스승 역할을 위해 사용하시는 작은 스승(a teacher)인 것은 맞다. 이 ‘작은 스승’을 ‘그 스승’이 아니라고 말하며 홀대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40-42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다. 건강하고 충성되며 선생의 역할을 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목사를 선생으로 영접한 자가 예수를 선생으로 영접한 것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한다(갈 6:6).
김태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