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도 교수
오늘은 고린도전서 강해 제4회로 고린도전서 3장을 공부하자.
3:1-4:21 에서는 하나님의 종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 들렸을 당시만 해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신령한자, spiritual men"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못하고 믿음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벧전 1:23 참고). 여기 고전 3:1에 보면, 아직도 그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젖으로,” 다시 말하면, 가장 기초적인 가르침으로 바울이 그들을 대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바울이 전했을까? 고린도전서 2:1-3을 보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하였다.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지만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바울신학의 핵심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가? 전도이다. 전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만담(rambling)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고전 3:3에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불신자와 다름없이 약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어떤 면으로 보나 별로 크리스천다운 생활이 아니었다. 오늘에도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는 받았으나 고린도교회 사람들 같은 분들이 많이 있다. 4절 이하에서 바울은 다시금 고린도교회의 당파싸움을 언급한다.(1:12을 참고할 것). 교회에서 파벌의식을 조성한다거나 그런 일에 관심 있는 성도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여기서 엄히 명한다. 우리 모두가 한 주님을 따르는 사역자들이다(5절).
사역자들에게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분쟁은 언제나 있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모두 1950 년 말부터 한국에 불어 닥친 소위 “에큐니칼 운동” 을 알고 있다. 목사와 장로가 문자 그대로 목덜미를 잡고 고함치며 싸우던 광경을 지금도 기억한다. 전국적으로 그런 불미스런 바람이 불었다. 그 후 장로교를 위시하여 여타 교단도 WCC 노선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파와 성경대로 믿자는 보수 파 교회가 분열 되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자유주의 와 보수주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경계선이 무너졌고 모두 순복음 일색이 되어 버렸다. 요즘 아프리카에서 “부흥” 된다고 대서특필하는 잡지 기사도 모두 카리스마 운동의 교회들이다. 게다가 요즘은 영지주의와 후기근대주의가 등장하여 교회는 인간중심의 예배로 변질되었고 양식있는 성도들은 대거 교회를 떠나 출석할 교회를 찾고 있다. 본 선교회의 이 메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가 날로 늘어만 가지만 소개할 바른 교회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7절에서는 바울이나 아볼로는 모두 하나님의 밑에서 봉사하는 일꾼들이다. 바울이 먼저 고린도에 전도했으니 “심은” 셈이다(롬 15:20을 보라), 그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 즉, 그가 사역하였다(사도행전 18:27 -19:1을 보라). 그러나 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계속 아볼로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했다하여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어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주의 종은 다투지 말고, 그의 하는 일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해야 하며, 전도할 때 우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손아래 달려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일이므로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전도만 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 받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 하신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8절에서는 전도하는 사역의 중요성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관심사는 <누구의 일이 더욱 중요한가? > 또 나중에 12장에서 다루지만, <누구의 은사가 더욱 중요한가? > 이런 생각들뿐이었다. 모두 인간적인 생각이다. 바울은 여기 8절에서 심는 자, 물주는 자가 모두 같다고 한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교회생활에서도 항상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른 사람의 직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교만해 진다. 이것은 큰 잘못이라고 바울은 역설한다. 이런 일로 교회에서 불평이나 혹은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교훈이다.
흔히 잘 못된 생각은 교회에서는 목사가 제일 높고 그 다음엔 장로, 집사 의 순으로 생각하고 있고, 어떤 교회에서는 심지어 "목사를 섬기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고 말하는 무식한 목사도 있는 세상이다. 성경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목회하는 목사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잘 가르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한 것이며 제멋대로 독재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할자로 알라" 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은 피로 교회를 사주시고 (양무리들), 그 양무리들을 주님의 뜻대로 목양하도록 목사에게 위임하고 그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그 권세는 하나님의 뜻에 따를때만 유효한 것이며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자기 뜻대로 양무리를 다스리면 이미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를 포기한 사람이므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 순종하면 주님에게 불순종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원리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가정과 국가과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세가지 기본 제도이기 때문이다. 가정의 가장이나 국가의 위정자 이나. 교회의 성직자는 모두 주님이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도록 권세를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이 한 가지를 잊지 말자.
교회의 직분은 높고 낮음이 없다. 모두 동일하다. 다만 하는 일 즉 직분만 다를 뿐이다. Orchestra 에서 그 많은 악기는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느 중요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휘하는 Maestro 뿐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몸의 지체의 비유를 하면서 신체의 어느 부분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업다고 말하면서 모든 제체가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다. 교회에서도 어느 직분은 귀하고 어느 직분은 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런 진리를 몰랐다.
본문 8절에서 “일반”이라는 말은 영어로 “equal" 즉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어느 사람의 직분이나 같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의 직분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향악을 비유해서 말한다면 어느 악기가 덜 중요한가? 모두 중요하다. 교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래서 9절에서 바울은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됨을 강조하면서 밭에서 일하는 것이 결국은 건물을 짓는 일, 즉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이바지하게 됨을 가르친다 (엡2:21-22 참고 할 것).
10절에서는 바울이 <건축자의 터를 닦는다>는 말로 복음으로 기독교의 진리의 기초를 가르쳐주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이 닦은 이 기초위에 사람들이 집을 세울 텐데 어떤 집을 세우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의 기초위에 어떤 형태의 신앙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가?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의 기초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11절 하 반절에서 말한다. 예수를 어떻게 믿는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이 궁극적 문제라는 말이다.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구원 받았다고 자신은 확신하지만 사실 거짓 신앙을 갖고 있어서 구원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갈라디아 1:9 참고). 어떤 분은 겨우 구원을 얻는 극히 소극적인 신앙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견고한 신앙,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15절까지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금이나 은” 이나 “보석“ 으로 집을 세울 것인가? 썩어질 “짚이나 흙” 으로 지을 것인가? 짚이나 풀로 지은 집이 오래 갈 수는 없다. 영속성이 없다. 불변하는 금이나 귀한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 신앙생활도 마친 가지이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극히 소극적 신앙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그런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확장에 이바지 아니 한다면 이는 분명 “금” 이나 “은” “보석”을 지은 집은 아닌 것이다.
13절에서 바울은 “그 날”을 말하는데 “최후의 심판 날”을 말한다. 모든 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판가름이 난다. 풀로 만들거나, 짚으로 만든 건물이 지금은 보기에 아름다울지 몰라도 나중에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건축업자가 집을 짓는다. 겉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집이 견고해서 비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미국 Boston 에 서 있는 건물들을 보라, 1600년대 지은 것들인데 400 년이 지나도 하나도 보수 공사할 것이 없이 완벽하게 서 있다. 물론 “금” 이나 “은”, “귀한 보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진리의 복음만이 구원으로 인도한다. 세상에는 항상 진리와 허위가 병행(竝行, juxtaposition)한다. 이것은 마지막 날까지 계속한다. 사탄의 목적중 하나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아름답게 보여 그것을 사람들이 동경하도록 마음을 흐려 놓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는 사탄은 책임을 회피하지만 사탄은 결국 꺼지지 않는 불 못(lake of fire)에 던져 지고야 만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16절의 “성전”은 원어에서 “hieron"이 아니고 ”naos"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뜰이 있고, 건물이 있고, 장식품이 있는 그런 성전의 건물을 암시(暗示, allusion)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God's dwelling place)을 말함이 분명하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시는 곳이다 (고전 3:16이하).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파벌 싸움으로 혹은 자기의 은사의 자랑으로 주님의 성령이 거하는 몸으로 여러 가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들을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례위기 10장 1절 이하의 나답과 아비후는 모두 요즘 말로 말하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목사로 임직한 <풋내기 성직자> 들이다. 하나님의 법대로 예배드리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가미하여 예배를 드렸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그 자리에서 불에 삼킨바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사무엘 상 13장의 사울의 경우를 보라, 사울은 제사장이 아니다. 그는 왕일뿐이다. 그는 제사를 드릴 자격이 없다. 그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분명한 월권행위(越權行爲, presumptuous deed)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 그는 벌을 받았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의 법대로 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 교회를 섬기는 법, 대인관계에서 서로 대하는 법,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오늘의 현실의 문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다.” 라는 생각을 제압(制壓,suppress)하여 하나님 공경의 생각이 희박해 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법을 몸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는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을 말한다(요이 6절, 요한복음 14:15, 21, 24절 등 참고할 것). 이 말씀은 지금 신약 시대에 수정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살아 있어서 만백성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엄숙한 말씀이다. 개혁주의 신앙가(信仰家)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그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고린도전서 3장17절애서 다시 읽어 본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란 말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교훈이다(마 5:48, 벧전 1:15-16, 레위기 11:44 등 참고). 레위기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거룩”이 전체의 주제(主題, theme)이다. “성도 (hagios)”라는 말 자체가 “세상 사람과는 분리된 거룩한 무리” 라는 말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성도를 말할 때 단수로 사용되지 않고 반드시 북수형인 “hagioi"로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백성의 무리가 따로 있고,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 mutual reciprocation)해야 하는 의미를 내포(內包, imply)한다. 갈라디아 6장을 읽어 보라,
18절에 보면, “미련한자가 되라”고 했다. 1:20-21을 되풀이 한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또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주님의 십자가는 “조롱받을 일(folly)” 로 보인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는, 즉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세상의 지혜에는 오히려 미련한자에게는, 주님의 십자가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서로 상반(相反, mutually contradict) 된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2:15).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데 이것은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성경적인 진리는 “죽으면 살고(마 16:25), 미련하면 지혜로워 진다(고전 3:18).”는 것인데 이는 매우 역설적(paradoxical, 逆說的)이다.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現世的, mundane), 육적인 일 (physical needs)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속적인 일”(永續的, perpetual) 한 “영의 생각” 을 영위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인간적인 욕망” 대로 행하지 말고 모든 일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매 하나님의 종은 항상 어떠한 형편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라고 권면하는 말로 고린도전서 3장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