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대단합니다. “만일 회개하고 일 깨지 아니하면 주님이 도적 같이 임하신다” 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임” 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고 살전 5:4에 말합니다. 그러나 벧후 3:10에는 “도적같이 임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경구절을 놓고 서로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잘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으니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방심하고 세상의 연락에 취해 있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합니다.
여기 본문에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 중에 “도적같이 임한다” 는 말은 심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교회에는 “심판” 이란 말이나 “지옥” 이란 말을 강대상에서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신학에서는 지옥과 천당의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고 그래서 죄를 참지를 못하는 분임을 설교하는 목사도 드믈고 그런 설교를 듣는다고 해도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본질적인 것은 간직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동화한다” 고 말하지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지엽적입니까? 하나님의 법가운데는 casuistic law (사례법) 이 있고 apodictic law (기본법) 이 있습니다. 사례법은 어떤 사건 중심으로 그 사건에만 해당되는 법입니다. 가령 남의 양을 도적질하면 4배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양을 도적질 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또 민사법이니 각 나라마다 헌법에 참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대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민사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란 말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때 이건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기본법입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관습 (Custom) 이 있고 원칙(Principle)이 있습니다. 원칙과 관습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가령 집집마다 외부 손님을 맞으면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Palestine 에 국한된 관습이지 그것이 시대나 문화를 초월해서 항상 남의 발을 썻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요 4:24) 는 말은 그런 관습법이 아닙니다. 원칙 (Principle) 입니다. 원칙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이유로든지 그 원칙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예배의 어느 부분이 ”진수“ 이고 어느 부분이 ”지엽“ 적입니까? 대부분 교회가 음악에 대해서는 자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예배시의 음악은 예배의 일부가 아닙니까? 예배란 설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예배 전체 요소를 모두 내포합니다. 기원, 묵도, 설교, 찬송, 헌금, 성례식, 축도 어느 하나 지엽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두 진수이며 필수입니다. 지엽적인 것을 말하려면 예배 장소와 예배 시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상황에 맞져 지혜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만 개혁주의 신학은 예배를 성경적으로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요즘 기독교 교계가 타락하고 성직자가 타락하여 남의 웃음꺼리가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극장으로 변해 갑니다. 예배는 수은자 중심이 아닙니다. 예배는 항상 시은자이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게 예배하는 길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영적 예배로 성경대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III 교회가 살려면
죽은 사데 교회가 살 길은 없을까요? 사는 길은 회개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흰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자 신앙을 지키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십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오늘의 교계에는 회개 운동은 거의 없고 대개 무슨 부흥운동이니 영성운동뿐입니다. 요즘 나오는 모든 best seller 기독교 서적은 하나같이 현세 중심이고 현세의 성공 중심입니다. 중.고생들이 많이 보고 있는 “Secret” 이라는 책도 모두 예수를 이용하여 인생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내용일색입니다. 이런 책들이 청소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해도 교회의 목회자들은 오히려 이런 서적을 장려합니다. 이것이 퇴폐한 현대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교회가 살려면 몇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깨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성경 교리에 밝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기독교가 침투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전파되어야합니다. 성경과 함께 개혁주의 신조들을 읽어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는 필수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 라고 매도합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건 헌법을 지킵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율법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이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골자는 첫째 율법을 통해서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율법은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내가 다 지키지 못할 율법을 내 대신 완전하게 십자가상에서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모두 지켜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율법의 목적은 우리 생활의 지침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표준과 규범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 15, 21, 23, 24 절 등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따르는 자요 내 제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폐기론자” (antinomian) 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혼동한 것입니다.
셋 째로,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 성도는 세상의 물결 따라 흘러가기 쉽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 교회가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교회에 커피샵을 차려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예배는 세상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열린 예배” 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벗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일을 해야 하며 절대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흰옷을 입으라” 고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사장직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제사장 직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는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직분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도 드믑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주님의 세 가지 직분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주님의 선지자 직분을 믿지 않는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의 왕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의 가리움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구약부터 모두 “가리움, cover" 의 종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니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속죄소도 백성의 죄를 가리는 목적입니다. 속죄일의 희생양도 백성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여 죄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입을 때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덧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을 들게 될 것입니다.
결론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왜 사데 교회를 주님이 “죽은 교회” 라고 하셨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형식만 있던 교회였습니다. 실속이 없는 형식적인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착각했던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2000년 전 소아세아의 적은 교회 였던 사데교회에만 국한된 말씀이겠습니까?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잘못된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현대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책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주님에게 책망 받을 자리에 있지나 않은지요?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리스챤” 이라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제61문에 보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를 향한 책망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합시다.
(고) Dr.김명도 목사, 교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BA (서울) Philadelphia Westminster 신학교 졸업, M.Div. Th.M. (신약) D.Min.(변증학) 개혁장로회 신학교 학감 (RPS,Los Angeles) 미국 개혁신학교(ARCS) 교장(Los Angeles) 미국 Los Angeles 소재 칼빈 신학교 대학원 원장. Tyndale International University 초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