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잘못
토저(A. W. Tozer)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오늘날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하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한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잘못된 관용
G. 캠벨 몰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 의무가 있다. 즉 ‘땅의 소금’이 되는 것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낙태, 동성애, 음란물, 그리고 다른 악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로 하여금 천주교인들과 힘을 합치기를 원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연합할 수 있지만,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종교적 방식으로 함께 행진하고 사역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함으로써 우리의 ‘빛’의 역할을 절충하고 혼란케 하는 댓가를 치루면서 ‘소금’의 역할을 강화시키려는 위험을 본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스펄젼은,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그 오류에 대한 어떤 성공적 저항을 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학적 차이점들을 제쳐놓고’ 거짓 복음을 조장하는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 예배할 때,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위는 ‘빛을 말 아래 감추는’ 격이다.
순결을 희생한 평화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교회연합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나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관용이 타협이 될 때
테리 아놀드(Terry Arnold)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 사고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그것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이제 덕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
김효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