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바쁨은 왜 끝이 없는가
이민자의 바쁨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 생기지 않는다. 시간 관리의 실패도 아니고, 성실함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 삶의 위치가 만들어낸 압박이다. 어느 나라든 이민자는 늘 증명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비자와 신분, 언어, 자격 인정, 직장의 신뢰, 집주인과 학교와 병원에서의 서류와 규정, 이런 것들이 하루하루를 시험처럼 만든다. 능력이 있어도, 성실해도, 오래 살아도 한 번 더 잘해야 하고, 한 번 더 보여줘야 하며, 한 번 더 안전하게 선택해야 한다. 실수할 여지는 적고, 뒤처질 권리는 더 적다. 그래서 바쁨은 선택이 아니라 삶의 기본자세가 된다.
이 바쁨에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도착점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이제 됐다”라고 말해도 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기준은 늘 움직이고, 기대는 계속 높아진다. 그래서 이민자의 삶은 항상 진행 중이다. 멈추는 순간 탈락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우리는 계속 다음 단계로 자신을 밀어붙인다.
문제는 이 긴장이 교회 안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인 교회는 이민자에게 쉼터이면서 동시에 또 하나의 사회다. 밖에서는 소수자였던 사람이, 안에서는 누군가가 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말이 통하고, 배경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며, 존재가 인식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위로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다시 뛰어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것은 바쁨의 이중 구조다. 사회에서의 바쁨과 교회 안에서의 또 다른 바쁨이다. 밖에서는 인정받기 위해 바쁘고, 안에서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바쁘다. 이미 사회에서 충분히 바쁜 이민자는 교회에 오면 오히려 더 바빠진다. 사역, 봉사, 역할, 직분, 모임, 책임.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신앙의 열매가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될 때다.
바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으면 잊힌다. 잊히면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 주류 사회에서 주변부를 경험한 이민자에게 이 감각은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라도 보이고 싶어진다. 목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그러니 바쁨은 끝나지 않는다. 멈추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신앙의 언어를 입는다. “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다른 고백이 숨어 있다.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자리가 사라질까 봐.” “여기서도 주변인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 바쁨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불안에서 나온 바쁨이다.
신앙은 본래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이민자의 현실 속에서 신앙은 종종 버팀목으로만 기능하기도 한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지지대가 된다는 뜻이다. 잘 살아남는 법은 배우지만, 잘 살아가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민자의 바쁨은 미래를 위해 시작되지만, 결국 현재를 삼킨다. 아이를 위해 바쁘고, 가정을 위해 바쁘고, 교회를 위해 바쁘지만 정작 지금 여기의 삶은 비어간다. 바쁨은 미덕처럼 보이지만, 삶의 중요한 질문을 미룬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까지 바쁜가, 이 바쁨이 정말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바빠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지속되는 바쁨은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정착하지 못한 삶의 증상이기도 하다. 쉼이 없는 이민자의 삶은 어디에서 살든 결국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다. 사회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쉼을 배워야 한다. 성경의 쉼은 단순히 피곤을 덜어내는 휴식이 아니다. 쉼은 내가 멈춰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고백이고, 내가 증명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쉼은 시간을 비우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주인을 바꾸는 선택이다. 바쁨이 내 삶을 끌고 가는 힘이라면, 쉼은 그 잘못된 힘에서 내려오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을 내려놓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복음은 더 분명해진다. 이민자의 삶이 끝없이 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네가 이뤄라. 네가 증명해라. 네가 자리 잡아라.”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정반대의 말을 남기셨다. “다 이루었다.” 신앙의 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삶의 바닥은 내가 완성해 쌓아 올린 것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구원에 있다. 내가 계속 무언가를 끝내야만 괜찮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신 분 안에서 괜찮아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쉼은 뒤처짐이 아니라 복음의 질서다. 쉼은 나의 성취가 아니라 그분의 이루심을 신뢰하는 자리다.
그러니 이민자로서 나의 정체감은 성취로 확고해지지 않는다. 언어 실력, 직장, 집, 자녀, 사회적 인정, 교회 안 역할, 이런 것들은 삶의 일부일 뿐이고, 정체감의 뿌리가 되기에는 너무 흔들린다. 복음은 뿌리를 다른 곳에 심는다. 나는 내 성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교회는 바쁜 사람들이 더 바빠지는 곳이 아니라, 정체감이 다시 고정되는 곳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도 증명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이미 받아들여졌구나”라는 고백이 회복되는 자리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봉사와 사역도 불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열매가 된다.
그래서 쉼은 선택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바쁨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아니라, 바쁨이 나를 끌고 가는 힘에서 내려오는 일이다. 이민자의 바쁨을 끝내는 가장 깊은 길은 결국 하나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삶을 그만두고, 예수님의 이루심 위에 나를 두는 것, 거기서부터 쉼이 시작된다.
이영길 교수 / <칼빈대학교>, '나는 홀가분하게 살고싶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