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의(Objection) # 1 - 사람은 마귀와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역사하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교적 체험을 통해 종종 사람들은 영적 세계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신령한 것의 실재함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체험 역시 구원의 확실한 징표는 아니다. 마귀나 저주받은 인간들도 많은 영적 체험들을 한다. 이런 체험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적 세계에서 살게 되며 영적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보게 된다. 이들은 영적 세계의 고통을 보고 구원이 얼마나 가치있으며 인간의 영혼이 너무나(상상할 수 있는 최대로) 가치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영적 세계에서 받는 고통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고통받는 자가 (하나님께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자기 형제들은) 이 고통의 자리를 면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은 이 생이 얼마나 짧으며 이후의 영원 세계가 얼마나 긴가를 분명히 안다. 영원 세계의 경험과 비교하면 이 생의 모든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이제 지옥에 들어간 자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지금 복음을 듣는 특권이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얻었음을 잘 안다. 이들은 자기 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 안다. 죄인들이 개인적 경험으로 죄의 최종 결과가 어떤 것인지 보게 될 때는 “울며 이를 감이 있다”(마 13 : 42). 그럼으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해도 그것이 자기 가슴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실한 징표는 아니다.
마귀와 저주받은 인간들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하신 분인지 안다. 하나님의 권능은 자기 대적들에 대한 성스러운 복수를 집행하는 것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용납하시고”(로 9 : 22) 마귀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력히 인식하고 떨면서 자기들에게 임할 마지막 형벌을 기다리고 있다. 마귀는 바로 지금 떨고 있지만 최대의 형벌은 미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우리 주 예수님이 “자기의 권능있는 천사들과 함께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하늘로부터 나타날”(데살 후 2 : 7 ?) 때이다. 그날에 마귀들은 도망쳐 하나님의 존전에서 숨고자 할 것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계 1 : 7)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영광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본 모든 사람이 구원되지는 않을 것이다.
5. 이의(Objection) # 2 - 사람은 마귀가 못 느끼는 종교적 느낌을 갖는다
이 세상에서 경건치 못한 자들이 마귀하고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 줄 안다. 이들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와 마귀는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마귀의 눈에는 보이며 지금 실제하는 것들이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고 미래의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영혼을 제약하는 육체라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어 영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들이 하나님의 것들을 직접 체험하고 그와 관련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지니고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결과가 (인간인) 나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또는 이런 식으로 말할지 모른다. “만약 사람이 영적인 것들을 이 생에서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가슴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확실한 징표라고 보는 게 당연하다.”
러한 이의에 답하겠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도 마귀가 누렸던 것들 이상으로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마귀만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벌벌 떨지도 않는다. 이 세상의 사람은 그 누구도 마귀 수준과 동일한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마귀와 저주받은 인간은 영원함이라는 그 아득함과 저승 세계의 중요성을 어떤 살아있는 인간보다 더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더욱더 이들은 구원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도 마귀나 저주받은 인간이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도 마귀가 지닌 것과 동일한 영적(정신적) 조망(전망)과 동일한 견해와 감정 그리고 이성과 감성에 대한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 이 점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확실히 그렇다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 한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라고 생각하는데 마귀들도 동일하게 믿기 때문에 그것은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병행하는 정서와 행위 모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벌벌 떤다는 것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서적 현상의 한 예이다. 사람이 마귀와 동일한 영적 전망을 하고 마귀와 동일한 방식으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정서적 반응을 한다고 할 때 그러한 정서적 반응은 확실한 은혜의 표징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가슴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지 못하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확히 어느 정도 자신을 특정 사람들에게 계시할지 또 거기에 사람이 가슴으로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선 모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정한 분량의 종교적 체험 내지 일정 분량의 진리 체험을 했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구원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슴속에 은총을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 더 큰 체험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 경험이나 지식의 양으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슴속에 진정한 성령의 역사함이 있는 사람은 뭔가 다른 경험과 지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발체) 참 크리스찬인지 어떻게 아는가 -조나단 에드워드